제17권
1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의 새벽 여신이 나타나자, 신 같은 오디세우스의 사랑하는 아들 텔레마코스는 발에 고운 신을 매어 신고 손에 꼭 맞는 굳센 창을 집어 들었다. 도시로 가려고 마음이 바빴던 그는 제 돼지치기에게 말했다.
6 "아저씨, 저는 이제 도시로 가요. 어머니가 저를 보셔야 하니까요. 제 얼굴을 직접 보시기 전에는 어머니가 끔찍한 통곡과 눈물 젖은 탄식을 그치지 않으실 것 같아요. 그리고 아저씨께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이 가엾은 손님을 도시로 데려가서 거기서 끼니를 빌어먹게 해 주세요. 누구든 마음 내키는 사람이 빵 한 조각과 술 한 잔을 줄 거예요. 저는 가슴에 시름을 안고 있는 몸이라 세상 사람을 다 떠맡을 수는 없으니, 손님이 그 일로 몹시 언짢아한다면 그만큼 손님만 더 괴로워지겠지요. 저는 참말을 하는 게 좋거든요."
16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대답했다. "젊은이, 나도 여기 붙잡혀 있고 싶은 마음은 없소. 거지는 들판보다 도시에서 끼니를 빌어먹는 편이 낫소. 누구든 마음 내키는 사람이 내게 줄 것이오. 나는 이제 농장에 머물며 감독이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 다 따를 나이가 아니오. 그러니 가 보시오. 당신이 시킨 대로 여기 이 사람이, 내가 불을 쬐어 몸을 녹이고 햇볕이 따뜻해지는 대로 곧 나를 데려갈 것이오. 내가 걸친 이 옷이 너무나 형편없어서 새벽녘 서리에 얼어 쓰러질까 걱정이오. 도시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들 하니 말이오."
26 그가 이렇게 말하자 텔레마코스는 성큼성큼 빠르게 걸어 농장을 빠져나갔다. 속으로 구혼자들에게 닥칠 재앙의 씨를 심으며 살기 좋은 집에 이른 그는, 들고 온 창을 높다란 기둥에 기대 세우고 돌 문지방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31 누구보다 먼저 그를 본 것은 유모 에우리클레이아였다. 공들여 꾸민 높은 의자마다 양털 가죽을 펴고 있던 유모는 눈물을 흘리며 곧장 그에게로 갔고, 마음이 꿋꿋한 오디세우스의 다른 하녀들도 그의 둘레로 모여들어 반갑게 맞으며 그의 머리와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36 사려 깊은 페넬로페가 방에서 나왔다. 아르테미스와도 같고 황금빛 아프로디테와도 같았다. 왕비는 눈물을 흘리며 사랑하는 아들을 두 팔로 끌어안고, 그 머리와 고운 두 눈에 입을 맞추고는 흐느끼며 날개 돋친 말을 건넸다.
41 "왔구나, 텔레마코스, 내 달콤한 빛. 네가 사랑하는 아버지 소식을 찾아 내 뜻을 거스르고 몰래 배를 타고 필로스로 떠난 뒤로, 나는 너를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다. 자, 네가 본 그대로 내게 낱낱이 이야기해 다오." 의젓한 텔레마코스가 대답했다. "어머니, 제 울음을 자아내지 마시고, 가파른 파멸을 겨우 벗어난 제 가슴을 뒤흔들지 마십시오. 그보다 몸을 씻으시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신 다음, 시녀들을 데리고 위층 방으로 올라가셔서, 제우스께서 언젠가 앙갚음의 일을 이루어 주신다면 모든 신께 흠 없는 큰 제물을 바치겠다고 기도하십시오. 저는 회의장으로 가서 손님 한 분을 모셔 오겠습니다. 제가 이리로 올 때 그곳에서부터 저를 따라온 분입니다. 저는 그분을 신에 버금가는 동료들과 함께 먼저 보내면서, 페이라이오스에게 그분을 집으로 모셔 가 제가 갈 때까지 정성껏 대접하고 받들어 모시라고 일러 두었습니다."
57 그가 이렇게 말하자, 페넬로페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날아오르지 않았다. 왕비는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제우스가 언젠가 앙갚음의 일을 이루어 준다면 모든 신께 흠 없는 큰 제물을 바치겠다고 기도했다.
61 텔레마코스는 창을 들고 홀을 지나 밖으로 나갔고, 날랜 개 두 마리가 그를 따라갔다. 아테나가 그에게 신묘한 기품을 쏟아부어 주니, 다가오는 그를 온 백성이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거만한 구혼자들이 그의 둘레로 모여들어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재앙을 꾸몄다. 그러나 텔레마코스는 그들의 큰 무리를 피해, 처음부터 아버지와 벗으로 지내 온 멘토르와 안티포스와 할리테르세스가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앉았고, 그들은 그에게 이것저것 캐물었다. 그때 창으로 이름난 페이라이오스가 손님을 데리고 도시를 가로질러 회의장으로 가까이 오자, 텔레마코스는 손님을 오래 외면하지 않고 그 곁으로 다가가 섰다. 페이라이오스가 먼저 그에게 말했다.
75 "텔레마코스, 어서 여자들을 우리 집에 보내 줘. 메넬라오스가 너에게 준 선물을 보내 줄게."
77 의젓한 텔레마코스가 대답했다. "페이라이오스, 이 일이 어떻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어. 거만한 구혼자들이 홀에서 몰래 나를 죽이고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나눠 가진다면, 그자들 가운데 누가 차지하느니 차라리 네가 그 선물을 갖고 누렸으면 해. 하지만 내가 그자들에게 살육과 죽음의 운명을 심어 준다면, 그때는 기뻐하는 나에게 너도 기뻐하며 우리 집으로 날라다 줘."
84 이렇게 말하고 그는 고생에 지친 손님을 집으로 데려갔고, 살기 좋은 집에 이르자 두 사람은 외투를 긴 의자와 높은 의자 위에 벗어 두고, 반들반들 다듬은 욕조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 하녀들이 그들을 씻기고 올리브기름을 발라 준 뒤 두툼한 외투와 윗옷을 입혀 주자, 그들은 욕조에서 나와 긴 의자에 앉았다. 시녀가 손 씻을 물을 아름다운 황금 물병에 담아 와 은대야 위로 부어 손을 씻게 하고, 곁에 반들반들한 식탁을 펴 놓았다. 살림 맡은 점잖은 여인이 빵을 가져다 놓고, 있는 음식을 아낌없이 내어 여러 가지 찬을 곁들였다. 어머니는 그들과 마주 보며 홀의 기둥 곁 긴 의자에 기대앉아 물레가락으로 가는 실을 잣고 있었다. 그들은 앞에 차려진 음식에 손을 뻗었다. 실컷 먹고 마셔 더 바랄 것이 없게 되자, 사려 깊은 페넬로페가 그들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101 "텔레마코스, 나는 이제 위층 방으로 올라가 잠자리에 눕겠다. 오디세우스가 아트레우스의 아들들과 함께 일리오스로 떠난 뒤로 그 잠자리는 내게 한숨의 자리가 되어 늘 내 눈물에 젖어 있다. 그런데 너는 거만한 구혼자들이 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 네 아버지의 귀향 소식을 어디서 들었다면 그것을 내게 똑똑히 말해 줄 마음조차 먹지 않는구나."
107 의젓한 텔레마코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머니, 사실을 낱낱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필로스로 가서 백성의 목자 네스토르를 찾아갔습니다. 그분은 저를 높은 집에 맞아들여, 아버지가 오랜만에 먼 곳에서 막 돌아온 제 아들을 맞듯이 정성껏 아껴 주셨고, 영광스러운 아들들과 함께 저를 그렇게 살뜰히 보살펴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꿋꿋한 오디세우스에 대해서는,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땅 위의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은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대신 말과 튼튼하게 짜 맞춘 수레를 내주시며 저를 아트레우스의 아드님, 창으로 이름난 메넬라오스께 보내 주셨습니다. 거기서 저는 아르고스의 헬레네를 보았습니다. 신들의 뜻에 따라 아르고스인과 트로이인이 그 여인 때문에 숱한 고생을 겪었지요. 함성이 우렁찬 메넬라오스께서 곧바로 무엇이 아쉬워 고귀한 스파르타에 왔느냐고 물으시기에 제가 사실을 낱낱이 말씀드렸더니, 그분이 제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124 "'허, 저들은 겁쟁이인 주제에 굳센 마음을 지닌 사내의 잠자리에 들려 하다니! 오디세우스는 저들에게 비참한 운명을 안길 걸세. 암사슴이 갓 태어나 아직 젖을 빠는 새끼 사슴들을 힘센 사자의 덤불 굴에 재워 두고, 산기슭과 풀 우거진 골짜기를 뒤지며 풀을 뜯을 때가 있지. 그때 사자가 제 굴로 돌아와 어미와 새끼 모두에게 비참한 운명을 안기네. 꼭 그처럼 오디세우스도 저들에게 비참한 운명을 안길 걸세. 아버지 제우스와 아테나와 아폴론이시여, 부디 오디세우스가 일찍이 잘 지은 도시 레스보스에서 필로멜레이데스와 시비가 붙자 맞붙어 씨름하다가 그를 힘껏 메어꽂아 모든 아카이아인을 기쁘게 했던 그 모습 그대로 구혼자들 사이에 나타난다면! 저들은 모두 명이 짧아지고 쓰디쓴 혼인을 치르게 될 걸세. 자네가 내게 묻고 간청하는 일이라면, 나는 이야기를 비켜 가며 엉뚱한 말을 하지도 않을 것이고 자네를 속이지도 않겠네. 바다에 사는, 거짓 없는 노인이 내게 해 준 말은 한 마디도 숨기거나 감추지 않겠네. 그 노인은 오디세우스가 섬에서, 님프 칼립소의 집에서 모진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네. 칼립소가 그를 억지로 붙잡아 두고 있어서 그는 고향 땅에 돌아갈 수 없다네. 노 달린 배도 전우도 없으니, 바다의 넓은 등 너머로 그를 실어 보내 줄 이가 없다네.'"
147 "아트레우스의 아드님, 창으로 이름난 메넬라오스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들을 다 마치고 저는 돌아왔습니다. 불사의 신들께서 순풍을 내려 주셔서 저를 사랑하는 고향 땅으로 빨리 데려다주셨습니다."
150 그가 이렇게 말하자 페넬로페는 가슴속 마음이 뒤흔들렸다. 그때 신을 닮은 테오클리메노스가 그들 가운데서 말했다.
152 "라에르테스의 아드님 오디세우스의 존귀하신 부인이시여, 텔레마코스는 똑똑히 알지 못하니, 숨김없이 정확하게 예언해 드릴 제 말을 새겨들으십시오. 이제 신들 가운데 먼저 제우스께서, 그리고 손님을 맞는 이 식탁과 제가 찾아온 나무랄 데 없는 오디세우스의 화덕이 증인이 되어 주소서. 오디세우스는 정녕 벌써 고향 땅에 와서, 어디 앉아 있든 돌아다니든 이 못된 짓들을 낱낱이 알아보며 구혼자들 모두에게 재앙을 심고 있습니다. 갑판 튼튼한 배에 앉아 있을 때 저는 그런 새점을 알아보고 텔레마코스에게 소리 높여 일러 주었습니다."
162 사려 깊은 페넬로페가 말을 받았다. "손님, 그 말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소. 그러면 당신은 곧 내게서 우정과 많은 선물을 받게 될 것이고, 당신을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을 복 받은 사람이라 부를 것이오."
166 이렇게 그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구혼자들은 오디세우스의 홀 앞, 전부터 늘 오만을 부리던 그 잘 다져 놓은 마당에서 원반과 사냥창을 던지며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녁 먹을 때가 되어 사방의 들에서 양 떼가 돌아오고, 늘 그래 왔듯이 목자들이 양 떼를 몰고 들어오자, 메돈이 그들에게 말했다. 메돈은 전령들 가운데 그들의 마음에 가장 들었고, 그들이 잔치를 벌일 때면 늘 곁에 있었다.
174 "젊은이들이여, 다들 시합으로 마음껏 즐기셨으니 이제 집 안으로 드십시오. 잔치를 차리겠습니다. 때맞추어 저녁을 드는 것도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177 그가 이렇게 말하자 그들은 일어나 그 말을 따라 걸어갔다. 살기 좋은 집에 이르자 그들은 외투를 긴 의자와 높은 의자 위에 벗어 두고, 큰 양과 살진 염소를 잡고, 살진 돼지와 무리에서 고른 암소도 잡아 잔치를 차렸다. 한편 오디세우스와 고귀한 돼지치기는 들에서 도시로 가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일꾼들의 우두머리인 돼지치기가 먼저 말을 꺼냈다.
185 "손님, 내 주인이 일렀듯이 당신이 오늘 꼭 도시로 가고 싶어 하니 어쩔 수 없구려. 나로서는 당신이 여기 남아서 농장을 지켜 주었으면 싶지만, 나중에 주인께서 나를 꾸짖으실까 봐 그분을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 터라 그럴 수가 없소. 주인들의 꾸지람은 매서운 법이오. 자, 이제 갑시다. 낮이 거의 다 지나갔으니 저녁 무렵이면 금세 더 추워질 것이오."
192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대답했다. "알겠소, 알아들었소. 생각 있는 사람에게 이르는 말이구려. 자, 갑시다. 당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앞장서 길을 이끄시오. 혹시 잘라 둔 막대기가 있거든 내가 짚고 갈 수 있게 하나 주시오. 길이 몹시 미끄럽다고들 하니 말이오."
197 이렇게 말하고 그는 어깨에 군데군데 해진 볼품없는 자루를 걸쳤다. 자루에는 꼬아 만든 끈이 어깨걸이로 달려 있었다. 에우마이오스는 그에게 마음에 꼭 맞는 지팡이를 건네주었다. 두 사람은 길을 떠났고, 농장은 뒤에 남은 개들과 목자들이 지켰다. 돼지치기는 주인을 도시로 이끌었다. 주인은 비참한 거지, 늙은이와 닮은 모습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몸에는 초라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204 그들은 험한 길을 따라 걸어 도시 가까이 이르렀고, 잘 지어 놓은 샘에 닿았다. 맑은 물이 흐르는 그 샘에서 시민들이 물을 길었다. 이타코스와 네리토스와 폴릭토르가 만든 샘이었다. 둘레에는 물을 먹고 자라는 백양나무 숲이 동그랗게 빙 둘러서 있었고, 차가운 물이 높은 바위에서 흘러내렸으며, 그 위에는 님프들의 제단이 쌓여 있어 길 가는 사람은 누구나 거기에 제물을 바쳤다. 그곳에서 돌리오스의 아들 멜란티오스가 그들과 마주쳤다. 멜란티오스는 구혼자들의 저녁거리로 모든 염소 떼 가운데 가장 빼어난 염소들을 몰고 가던 길이었고, 목자 둘이 함께 따라왔다. 그는 두 사람을 보자 지독하고 볼썽사나운 말로 꾸짖으며 이름을 불러 말했다. 오디세우스의 가슴이 뒤흔들렸다.
217 "이제 보니 영락없이 못난 놈이 못난 놈을 끌고 가는구나. 신은 언제나 끼리끼리 짝을 지어 주는 법이지. 이 몹쓸 돼지치기야, 이 게걸스러운 놈을 어디로 데려가는 거냐? 잔칫상을 핥고 다니는 성가신 거지 아니냐. 이런 놈은 이 집 저 집 문설주 곁에 서서 어깨를 비벼 대며 칼이나 솥이 아니라 빵 부스러기나 빌어먹지. 이놈을 내게 주어 농장을 지키게 한다면 우리를 치우고 새끼 염소들에게 연한 잎을 날라다 주게 할 텐데. 그러면 유장이라도 마셔서 넓적다리에 살이 두둑이 오를 거다. 하지만 이놈은 못된 짓만 배워 놔서 일하러 다닐 생각은 없고, 고을을 굽실거리며 돌아다니면서 빌어먹어 그 밑 빠진 배나 채우고 싶어 하지. 그러니 내 너에게 똑똑히 일러두마. 이 말은 꼭 이루어질 거다. 이놈이 신 같은 오디세우스의 집에 가면, 사내들 손에서 날아온 숱한 발판이 이놈 머리 둘레로 쏟아지고, 집 안에서 이리저리 얻어맞는 동안 이놈 옆구리가 그 발판들을 다 닳게 할 거다."
233 이렇게 말하고 멜란티오스는 곁을 지나가면서 어리석게도 오디세우스의 엉덩이를 걷어찼지만 그를 길 밖으로 밀어내지는 못했고, 오디세우스는 꿈쩍 않고 버티고 섰다. 그는 속으로 망설였다. 달려들어 지팡이로 저자의 목숨을 빼앗을까, 아니면 허리를 잡아 번쩍 들어 올려 머리를 땅바닥에 메어꽂을까. 그러나 그는 꾹 참고 속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돼지치기는 멜란티오스를 마주 노려보며 꾸짖고, 두 손을 높이 들어 큰 소리로 기도했다.
240 "샘의 님프들이여, 제우스의 따님들이시여, 일찍이 오디세우스가 새끼 양과 새끼 염소의 넓적다리뼈를 기름진 비계로 싸서 님프들께 태워 바친 적이 있다면, 제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그분이 돌아오게 하시고, 어떤 신이 그분을 이끌어 주게 하소서. 그러면 그분이 너의 그 겉멋을 모조리 흩어 버릴 것이다. 너는 지금 그 겉멋을 부리며 오만하게 늘 도시를 쏘다니고, 양 떼는 못된 목자들이 망쳐 놓고 있지 않으냐."
247 염소치기 멜란티오스가 말을 받았다. "허, 못된 꾀만 아는 이 개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언젠가 내가 이놈을 갑판 튼튼한 검은 배에 태워 이타카에서 먼 곳으로 데려가겠다. 거기서 팔아넘기면 내게 큰 재산을 벌어다 주겠지. 오디세우스가 저 먼 곳에서 귀향의 날을 잃어버린 것이 틀림없듯이, 은활의 아폴론이 오늘 홀에서 텔레마코스를 쏘아 맞히거나 그놈이 구혼자들 손에 쓰러졌으면 좋겠다."
254 이렇게 말하고 멜란티오스는 천천히 걸어오는 두 사람을 그 자리에 남겨 두고 앞서 갔고, 아주 빠르게 주인의 집에 이르렀다. 그는 곧장 안으로 들어가 구혼자들 사이, 누구보다 따르던 에우리마코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일하는 사람들이 그의 앞에 고기 몫을 놓아 주었고, 살림 맡은 점잖은 여인이 빵을 가져다 놓아 먹게 했다. 오디세우스와 고귀한 돼지치기가 걸어와서 집 가까이 멈춰 서자, 페미오스가 구혼자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려고 막 첫 소리를 띄우는 참이라 우묵한 리라 소리가 그들 둘레로 울려 퍼졌다. 오디세우스는 돼지치기의 손을 잡고 말했다.
264 "에우마이오스, 이것이 바로 오디세우스의 아름다운 집이 틀림없소. 여러 집 가운데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겠구려. 건물이 잇달아 이어져 있고, 안뜰은 담장과 갓돌로 둘러쳐 있으며, 문은 튼튼한 두 짝 문이니, 어느 누구도 이 집을 힘으로 넘보지 못할 것이오. 안에서는 많은 사내가 잔치를 벌이고 있는 줄 알겠소. 기름 연기가 피어오르고, 신들이 잔치의 짝으로 만들어 준 리라가 울리니 말이오."
272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여, 그대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금세 알아보는구려. 당신은 다른 일에도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니 말이오. 자, 그러면 이 일을 어떻게 할지 궁리해 봅시다. 당신이 먼저 살기 좋은 집 안으로 들어가 구혼자들 사이에 끼고 나는 여기 남아 있을까, 아니면 당신만 좋다면 당신이 여기서 기다리고 내가 앞서 들어갈까. 다만 오래 지체하지는 마시오. 누가 밖에 있는 당신을 보고 무엇을 던지거나 때릴지도 모르오. 그 일을 잘 생각해 두라고 일러 두는 것이오." 참을성 많은 고귀한 오디세우스가 대답했다.
281 "알겠소, 알아들었소. 생각 있는 사람에게 이르는 말이구려. 당신이 앞서 들어가시오. 나는 여기 남아 있겠소. 나는 얻어맞는 일에도 무엇에 맞는 일에도 서툴지 않소. 파도와 전쟁 속에서 숱한 재앙을 겪어 온 터라 내 마음은 꿋꿋하오. 그 재앙들에 이것도 하나 더 얹히라지. 그러나 굶주린 배는 감출 길이 없소. 사람들에게 숱한 재앙을 안기는 저주받을 배요. 이 배 때문에 노 젓는 자리를 잘 갖춘 배들이 채비를 하고 거둘 것 없는 바다로 나가 원수들에게 재앙을 실어 나르기도 하오." 이렇게 그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거기 누워 있던 개 한 마리가 머리를 들고 귀를 쫑긋 세웠다. 마음이 꿋꿋한 오디세우스의 개 아르고스였다. 일찍이 오디세우스가 몸소 길렀으나 그 덕을 보기도 전에 신성한 일리오스로 떠나고 말았다. 예전에는 젊은이들이 아르고스를 데리고 들염소와 사슴과 토끼를 사냥하러 다녔지만, 주인이 떠나고 없는 지금 아르고스는 버림받은 채, 문 앞에 수북이 쌓인 노새와 소의 똥 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오디세우스의 종들이 그 똥을 날라다 넓은 영지에 거름을 주려고 쌓아 둔 것이었다. 그곳에 개 아르고스가 진드기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었다. 오디세우스가 가까이 와 있는 것을 알아보자 아르고스는 꼬리를 흔들고 두 귀를 내렸지만, 제 주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기운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오디세우스는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에우마이오스가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 그렇게 하고는 곧바로 그에게 물었다.
306 "에우마이오스, 똥 더미에 누운 저 개는 참 놀랍구려. 생김새는 훌륭한데, 그 생김새만큼 달리기도 빨랐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식탁 곁에 두는 개처럼 그저 그런 개였는지 나는 잘 모르겠소. 주인들은 그런 개를 보기 좋으라고 기르니 말이오."
311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여, 그대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참으로 이 개는 먼 곳에서 죽은 사람의 개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로 떠나며 남겨 두었을 때처럼 생김새도 솜씨도 그대로라면, 그 날램과 힘을 보고 당신은 금세 놀랄 것이오. 깊은 숲 속 깊은 곳에서 이 개가 쫓은 짐승은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했소. 발자국을 쫓는 데도 아주 밝았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비참한 신세가 되었소. 주인은 고향을 떠나 먼 곳에서 죽었고, 여자들은 무심해서 돌보아 주지 않소. 종이란 주인이 더는 다스리지 않으면 제 할 일을 도리대로 하려 들지 않는 법이니, 멀리 내다보는 제우스께서는 사람에게 종살이의 날이 닥치면 그 사람의 빼어남을 절반이나 앗아 가시기 때문이오."
324 이렇게 말하고 그는 살기 좋은 집 안으로 들어가, 홀을 곧장 가로질러 당당한 구혼자들에게로 갔다. 아르고스는 스무 해 만에 오디세우스를 보자마자 검은 죽음의 운명에 사로잡혔다.
328 신을 닮은 텔레마코스가 누구보다 먼저, 집 안으로 들어오는 돼지치기를 보았다. 그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여 돼지치기를 제 곁으로 불렀다. 돼지치기는 두리번거리다가 걸상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집어 들었다. 고기 나누는 이가 집 안에서 잔치를 벌이는 구혼자들에게 고기를 잔뜩 나누어 줄 때 늘 앉던 걸상이었다. 돼지치기는 그 걸상을 텔레마코스의 식탁 맞은편으로 가져다 놓고 거기 앉았다. 전령이 고기 몫을 집어 그 앞에 놓아 주고 바구니에서 빵을 꺼내 주었다.
336 그 뒤를 바짝 따라 오디세우스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비참한 거지, 늙은이와 닮은 모습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몸에는 초라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문 안쪽의 물푸레나무 문지방 위에 앉아 사이프러스 나무 문설주에 기대었는데, 일찍이 목수가 솜씨 좋게 깎아 먹줄에 맞춰 곧게 다듬은 문설주였다. 텔레마코스는 돼지치기를 곁으로 불러, 더없이 아름다운 바구니에서 빵 한 덩이를 통째로 집고 두 손에 가득 들어갈 만큼 고기를 집어 들고는 그에게 말했다. "이것을 저 손님께 가져다 드리세요. 그리고 구혼자들을 하나하나 다 찾아다니며 빌어 보라고 일러 주세요. 궁한 사람에게 염치는 좋을 게 없으니까요."
348 그가 이렇게 말하자 돼지치기는 그 말을 듣고 가서, 오디세우스 가까이 서서 날개 돋친 말을 건넸다.
350 "손님, 텔레마코스가 이것을 당신에게 주면서, 구혼자들을 하나하나 다 찾아다니며 빌어 보라고 하오. 빌어먹는 사람에게 염치는 좋을 게 없다는구려."
353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대답했다. "제우스 왕이시여, 텔레마코스가 사람들 가운데서 복을 누리게 하시고, 그가 속으로 바라는 일은 무엇이든 다 이루어지게 하소서."
356 이렇게 말하고 그는 두 손으로 받아 발 앞, 볼품없는 자루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노래꾼이 홀에서 노래하는 동안 그것을 먹었다. 그가 다 먹자 신과 같은 노래꾼도 노래를 그쳤고 구혼자들은 홀 안에서 떠들썩하게 소리를 질렀는데, 그때 아테나가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디세우스 곁에 다가서서, 구혼자들 사이를 돌며 빵 조각을 얻어 보라고 부추겼다. 그들 가운데 누가 도리를 알고 누가 도리를 모르는지 알아보게 하려는 뜻이었으나, 그렇다고 여신이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재앙에서 건져 줄 생각은 아니었다. 오디세우스는 오른쪽부터 차례로 사내들 하나하나에게 빌러 다니며, 오래전부터 거지였던 것처럼 사방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가엾게 여겨 무언가를 주면서도 그를 보고 놀라, 저 사람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느냐고 서로 물었다.
369 그때 염소치기 멜란티오스가 그들 가운데서 말했다. "이름 높은 왕비님의 구혼자들이시여, 이 나그네에 대해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저는 이자를 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돼지치기가 이자를 이리로 데려오더군요. 그러나 이자가 어디 태생이라고 자처하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374 그가 이렇게 말하자 안티노오스가 말로 돼지치기를 꾸짖었다. "이 소문난 돼지치기야, 어쩌자고 이자를 도시로 데려왔느냐? 잔칫상을 핥고 다니는 성가신 거지, 떠돌이들이 우리에게는 이미 넉넉하지 않으냐? 이자들이 여기 몰려와 네 주인의 살림을 먹어 치우는 것으로는 성에 안 차서 너까지 이자를 불러들였느냐?"
380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여, 그대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안티노오스, 당신은 귀한 집안 사람이면서도 말을 곱게 하지 않는구려. 백성을 위해 일하는 장인, 곧 예언자나 병을 고치는 의원이나 나무 다루는 목수, 아니면 노래로 즐거움을 주는 신묘한 노래꾼 같은 이들이라면 몰라도, 누가 몸소 다른 곳에 찾아가서 나그네를 불러오겠소? 이런 사람들은 끝없는 땅 어디서든 사람들이 불러들이오. 그러나 제 살림을 축낼 거지를 불러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소. 당신은 구혼자들 가운데서도 언제나 유독 오디세우스의 종들에게 모질게 굴었고, 그중에서도 내게 가장 모질었소. 그래도 분별 있는 페넬로페와 신을 닮은 텔레마코스가 홀에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나는 개의치 않소."
392 의젓한 텔레마코스가 대답했다. "조용히 하세요. 저 사람에게 길게 대꾸하지 마세요. 안티노오스는 늘 모진 말로 사람을 못되게 약 올리고 다른 사람들까지 부추기는 버릇이 있어요."
396 이렇게 말하더니 그는 안티노오스에게 날개 돋친 말을 건넸다. "안티노오스, 당신은 아버지가 아들을 돌보듯 나를 참 잘도 돌봐 주는구려. 억지로 내쫓는 말로 이 손님을 홀에서 몰아내라고 하다니. 신께서 그런 일은 이루지 마시기를! 저 사람에게 집어 주시오. 아까워서 하는 말이 아니오. 내가 그러라고 하는 것이오. 그 일로 내 어머니나, 신 같은 오디세우스의 집에 있는 다른 종들을 어려워할 것은 없소. 그러나 당신 가슴속에는 그런 생각이 없구려. 남에게 주기보다 당신이 실컷 먹고 싶을 뿐이니 말이오." 안티노오스가 대답했다. "큰소리치며 혈기를 못 누르는 텔레마코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구혼자들이 모두 저자에게 내가 줄 만큼씩만 내밀어 준다면, 저자는 석 달 동안 이 집 근처에 얼씬도 못 할 걸세."
409 이렇게 말하고 안티노오스는 식탁 밑에 놓여 있던 발판을 집어 들어 보였다. 잔치를 벌이며 반들거리는 발을 올려놓던 발판이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무언가를 주어 자루를 빵과 고기로 가득 채워 주었다. 오디세우스는 곧 문지방으로 돌아가 아카이아인들이 거저 준 것을 맛보려던 참이었는데, 안티노오스 곁에 멈춰 서서 그에게 말했다.
415 "주시오, 나리. 보아하니 당신은 아카이아인들 가운데 가장 못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뛰어난 사람 같구려. 왕처럼 보이니 말이오. 그러니 당신은 다른 이들보다 더 넉넉히 빵을 주어야 하오. 그러면 나는 끝없는 땅 어디서나 당신을 기리겠소. 나도 한때는 사람들 사이에서 넉넉한 집을 꾸리고 부유하게 살면서 떠돌이가 어떤 사람이든 무엇이 아쉬워 찾아왔든 자주 베풀었고, 종도 셀 수 없이 많았으며 사람들이 잘 살며 부자라 불리는 데 필요한 다른 것들도 많았소. 그러나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가 그 모든 것을 앗아 갔소. 아마 그것이 그의 뜻이었겠소. 제우스는 나를 망치려고, 떠돌아다니는 해적들과 함께 먼 길을 떠나 이집트로 가게 했소. 나는 이집트강에 양 끝이 휜 배들을 세웠소. 그리고 정다운 전우들에게 배 곁에 그대로 머물며 배를 지키라고 이르고, 정찰병들을 망보는 자리로 내보냈소. 그런데 전우들은 오만에 빠져 제 기운만 믿고 날뛰며, 곧바로 이집트 사람들의 더없이 아름다운 들판을 휩쓸었소.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끌고 오고 사내들은 죽였소. 금세 함성이 도시까지 닿았소. 함성을 들은 그곳 사람들이 날이 밝자마자 쳐들어왔소. 온 들판이 보병과 말과 청동의 번득임으로 가득 찼소. 벼락을 즐기는 제우스께서 내 전우들에게 비참한 겁을 불어넣으셔서, 아무도 버티고 맞서 싸우지 못했으니, 재앙이 사방에서 우리를 에워싼 까닭이었소. 그들은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을 날카로운 청동으로 죽였고, 나머지는 산 채로 끌고 가 억지로 종살이를 시켰소. 그런데 그들은 나를, 마침 그곳에 와 있던 손님인 이아소스의 아들 드메토르에게 넘겨 키프로스로 보냈는데, 드메토르는 키프로스를 힘으로 다스리던 사람이었소. 거기서 나는 이렇게 재앙을 겪으며 지금 이곳으로 왔소." 안티노오스가 대답했다. "어떤 신이 이 재앙을, 잔치의 골칫거리를 데려왔느냐? 거기 그대로 한가운데로 비켜서라. 내 식탁에서 떨어져 있어라. 안 그러면 곧 쓰라린 이집트와 키프로스에 다시 닿게 될 거다. 너는 참 뻔뻔하고 염치없는 거지로구나. 차례로 모든 사람 곁에 다가서니 말이다. 저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주는 거다. 남의 것을 베푸는 데는 아끼는 마음도 가엾게 여기는 마음도 없거든. 저마다 곁에 넉넉히 쌓여 있으니까."
453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허, 당신은 생김새만 그럴듯하고 속은 그만 못하구려. 당신이라면 당신 집 문 앞에 와서 서는 사람에게 소금 한 톨도 주지 않겠구려. 지금 남의 식탁에 앉아 있으면서도 빵을 조금 떼어 내게 줄 마음조차 먹지 못하니 말이오. 여기 저렇게 많이 있는데도."
458 그가 이렇게 말하자 안티노오스는 속에서 더욱 화가 치밀어 그를 노려보며 날개 돋친 말을 건넸다. "네가 이제 욕지거리까지 지껄이니, 이 홀에서 곱게 물러나지는 못할 줄 알아라."
462 이렇게 말하고 그는 발판을 집어 던졌다. 발판은 오디세우스의 오른쪽 어깨, 등 맨 위쪽에 맞았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바위처럼 꿈쩍 않고 섰다. 안티노오스가 던진 것도 그를 비틀거리게 하지 못했다. 그는 잠자코 고개를 저으며 속 깊이 재앙을 꾸몄다. 그러고는 문지방으로 돌아가 앉아, 가득 찬 자루를 내려놓고 구혼자들 가운데서 말했다.
468 "이름 높은 왕비의 구혼자들이여, 내 말을 들어 보시오. 가슴속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말하겠소. 사내가 제 재산을 지키려고 소나 하얀 양 떼를 두고 싸우다가 얻어맞을 때에는 속에 괴로움도 슬픔도 없지만, 안티노오스는 비참한 배 때문에 나를 쳤소. 사람들에게 숱한 재앙을 안기는 저주받을 배 때문에 말이오. 거지들에게도 신들과 에리니에스가 있다면, 혼례를 올리기 전에 죽음의 끝이 안티노오스를 덮치기를 바라오."
477 에우페이테스의 아들 안티노오스가 말을 받았다. "나그네, 가만히 앉아서 먹기나 해라. 아니면 딴 데로 가 버리든가. 네가 지껄이는 꼴을 보니, 젊은이들이 네 발이나 손을 붙잡고 집 안을 질질 끌고 다니며 네 살갗을 온통 벗겨 놓을지도 모르겠다."
481 그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 몹시 분개했다. 오만한 젊은이들 가운데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483 "안티노오스, 가엾은 떠돌이를 친 것은 잘한 짓이 아닐세. 이 몹쓸 사람아, 혹시 하늘에 사는 어떤 신이라면 어쩌려고 그러나. 신들은 먼 고장에서 온 나그네의 모습을 하고, 온갖 모습으로 바뀌어 도시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사람들의 오만과 올바름을 지켜보신다네."
488 구혼자들은 이렇게 말했지만 안티노오스는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가 맞는 것을 보고 가슴속에 큰 슬픔이 차올랐지만, 눈꺼풀에서 눈물 한 방울 땅에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는 잠자코 고개를 저으며 속 깊이 재앙을 꾸몄다.
492 사려 깊은 페넬로페는 손님이 홀에서 얻어맞았다는 말을 듣고 하녀들 가운데서 말했다. "활로 이름난 아폴론이 바로 너를 그렇게 쏘아 맞혔으면!" 살림 맡은 여인 에우리노메가 말을 받았다. "우리가 비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저자들 가운데 누구도 아름다운 옥좌의 새벽 여신을 보지 못할 거예요."
498 사려 깊은 페넬로페가 말을 받았다. "유모, 저들은 모두 원수일세. 다들 재앙을 꾸미고 있으니. 그 가운데서도 안티노오스가 검은 죽음의 운명을 가장 닮았네. 어떤 가엾은 나그네가 궁한 처지에 몰려 사내들에게 빌며 집 안을 떠돌고 있는데, 다른 이들은 모두 그의 자루를 채워 주고 무언가를 주었건만, 저자는 발판을 던져 그의 오른쪽 어깨 맨 위를 쳤다는군."
505 페넬로페는 방에 앉아 하녀들 가운데서 이렇게 말했다. 그사이 고귀한 오디세우스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 왕비는 고귀한 돼지치기를 곁으로 불러 말했다.
508 "고귀한 에우마이오스, 가서 그 손님더러 이리 오라고 이르게. 그에게 인사도 건네고, 혹시 마음이 꿋꿋한 오디세우스의 소식을 들었거나 제 눈으로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네. 많이 떠돌아다닌 사람 같으니 말일세."
512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여, 그대는 왕비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왕비님, 아카이아인들이 조용히만 해 준다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왕비님의 마음도 홀릴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배에서 도망쳐 나와 맨 먼저 저를 찾아왔기에 저는 그를 사흘 밤 동안 데리고 있었고 사흘 낮 동안 제 오두막에 붙잡아 두었지만, 그 사람은 그동안에도 제 불행을 다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노래꾼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신들에게서 배워 인간들에게 그리운 이야기를 노래하는 노래꾼인데, 그가 노래할 때면 사람들은 한없이 듣고 싶어 합니다. 꼭 그처럼 그 사람은 제 집에서 곁에 앉아 저를 홀렸습니다. 그 사람 말로는 자기가 오디세우스와 아버지 대부터의 손님 벗이고, 미노스의 후손이 사는 크레타에 산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이렇게 재앙을 겪으며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지금 이리로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가 가까이, 테스프로티아인들의 기름진 고장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단언합니다. 그분은 많은 보물을 가지고 집으로 오고 계시답니다."
528 사려 깊은 페넬로페가 말을 받았다. "가서 그 사람을 이리 불러오게. 내 앞에서 몸소 이야기하게 말일세. 저들은 문가에 앉아서든 여기 집 안에서든 마음껏 놀라지. 저들의 마음은 즐겁기만 하니. 저들 자신의 재산은 빵이든 달콤한 술이든 집에 고스란히 놓여 있고, 저들 집의 하인들이나 그것을 먹지. 그 대신 그자들은 날마다 우리 집에 드나들며 소와 양과 살진 염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고 반짝이는 포도주를 함부로 마셔 대니, 살림이 거의 바닥났네. 이 집에서 재앙을 막아 줄 사람, 오디세우스 같은 사람이 이제 없기 때문일세. 오디세우스가 돌아와 고향 땅에 닿기만 한다면, 제 아들과 함께 곧 저 사내들의 횡포를 앙갚음할 텐데."
541 왕비가 이렇게 말하자 텔레마코스가 크게 재채기를 했고, 그 소리가 집 안 가득 무시무시하게 울렸다. 페넬로페는 웃음을 터뜨리고 곧 에우마이오스에게 날개 돋친 말을 건넸다.
544 "어서 가서 그 손님을 이리 내 앞으로 불러오게. 내 아들이 내가 한 말마다 재채기로 답하는 것을 보지 못했나? 그러니 구혼자들 모두에게 반드시 죽음이 이루어질 걸세. 아무도 죽음과 죽음의 운명을 피하지 못할 걸세. 또 한 가지 일러 줄 테니 가슴에 새겨 두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모두 참말인 줄 알게 되면, 외투와 윗옷, 고운 옷을 그에게 입혀 주겠네."
551 왕비가 이렇게 말하자 돼지치기는 그 말을 듣고 가서, 오디세우스 가까이 서서 날개 돋친 말을 건넸다.
553 "나그네 어르신, 텔레마코스의 어머니, 사려 깊은 페넬로페께서 당신을 부르시는데, 숱한 시름을 겪으셨지만 남편 일로 당신에게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시는 모양이오. 당신이 하는 말이 모두 참말인 줄 아시면, 당신에게 무엇보다 아쉬운 외투와 윗옷을 입혀 주실 것이오. 빵은 고을을 돌며 빌어서 배를 채우면 되오. 누구든 마음 내키는 사람이 당신에게 줄 것이오."
560 참을성 많은 고귀한 오디세우스가 말을 받았다. "에우마이오스, 그분의 남편 일이라면 내가 잘 알고 우리는 같은 고난을 겪었으니, 나는 이카리오스의 딸, 사려 깊은 페넬로페께 참말을 모두 곧 말씀드릴 수 있소. 그러나 모진 구혼자들의 무리가 두렵소. 그자들의 오만과 횡포는 무쇠 하늘까지 닿았소. 방금도 집 안을 지나가는 나를,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저 사내가 쳐서 고통을 안겼지만, 텔레마코스도 다른 누구도 그것을 막아 주지 않았소. 그러니 이제 페넬로페께 아무리 마음이 급하시더라도 해가 질 때까지 홀에서 기다리시라고 전해 주시오. 그때 나를 불 곁에 더 가까이 앉히시고 남편의 귀향의 날을 물으시라 하시오. 내 옷이 초라하니 말이오. 당신도 아는 일이오. 내가 맨 처음 당신에게 탄원했으니."
574 그가 이렇게 말하자 돼지치기는 그 말을 듣고 갔다. 돼지치기가 문지방을 넘어서자 페넬로페가 그에게 말했다.
576 "그 사람을 데려오지 않았군, 에우마이오스. 그 떠돌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누구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까닭으로 집 안에서 수줍어하는 건가? 수줍어하는 떠돌이는 못난 떠돌이일세."
579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여, 그대는 왕비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 사람은 도리에 맞는 말을 합니다. 다른 사람이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오만한 사내들의 오만을 피하려는 것이지요. 그래서 왕비님께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으니, 왕비님, 왕비님께서도 그렇게 손님과 단둘이 말씀을 나누시고 이야기를 들으시는 편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사려 깊은 페넬로페가 말을 받았다. "그 손님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로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제대로 짐작하고 있네. 죽을 운명의 인간들 가운데 이처럼 오만을 부리며 무모한 짓을 꾸미는 사내들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
589 왕비가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 고귀한 돼지치기는 모든 것을 다 일러 주고 구혼자들의 무리 속으로 가서,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텔레마코스에게 머리를 바짝 붙이고 곧 날개 돋친 말을 건넸다.
593 "얘야, 나는 이제 돌아가서 돼지들과 그곳 살림을 지키겠다. 너와 내 살림이니 말이다. 여기 일은 모두 네가 맡아 돌보아라. 무엇보다 먼저 네 몸을 지키고, 험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마음을 써라. 아카이아인들 가운데 많은 자가 못된 생각을 품고 있다. 제우스께서 저들이 우리에게 재앙이 되기 전에 저들을 모조리 없애 주시기를!"
598 의젓한 텔레마코스가 대답했다. "그렇게 할게요, 아저씨. 아저씨는 저녁을 드시고 가세요.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좋은 제물을 몰고 오세요. 여기 일은 모두 저와 불사의 신들께서 돌볼 거예요."
602 그가 이렇게 말하자 돼지치기는 다시 반들반들 다듬은 걸상에 앉았다.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마음을 든든히 채운 뒤 그는 안뜰과, 잔치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 찬 홀을 뒤에 남기고 돼지들에게로 떠났다. 사람들은 춤과 노래로 흥겹게 즐겼다. 날은 벌써 저물녘에 이르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