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권
1 배가 있는 바닷가로 내려간 우리는 먼저 배를 빛나는 바다로 끌어내리고, 검은 배에 돛대를 세우고 돛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데려다 배에 싣고, 우리도 굵은 눈물을 쏟으며 비통한 마음으로 배에 올랐습니다. 머리채 고운 키르케, 사람의 말을 하는 무서운 여신이 뱃머리가 검푸른 배 뒤쪽에서 돛을 가득 채우는 순풍을 보내 주었는데, 훌륭한 길동무 같은 바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배 안의 연장들을 하나하나 손본 다음 앉아 있었고, 바람과 키잡이가 배를 몰아갔습니다. 배는 온종일 돛을 활짝 편 채 바다를 건너갔습니다. 해가 지고 길이란 길이 모두 어둠에 잠겼습니다.
13 배는 물살 깊은 오케아노스의 끝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에는 킴메리오이족의 고장과 도시가 있었는데, 안개와 구름에 싸여 있었습니다. 빛나는 해가 별이 총총한 하늘로 오를 때도, 하늘에서 다시 땅으로 내려올 때도 그들을 햇살로 비추어 보는 일이 없었고, 가엾은 인간들 위로 끔찍한 밤이 덮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이르러 배를 뭍에 대고 양들을 끌어낸 다음, 오케아노스의 물줄기를 따라 걸어가 키르케가 일러 준 곳에 이르렀습니다.
23 거기서 페리메데스와 에우릴로코스가 제물을 붙잡았고, 나는 허벅지 곁에서 날카로운 칼을 뽑아 가로세로 한 자쯤 되는 구덩이를 팠습니다. 그 둘레에 모든 죽은 이를 위해 부어 바칠 것을 부었습니다. 먼저 꿀 섞은 우유를, 그다음에는 달콤한 포도주를, 셋째로는 물을 붓고 그 위에 흰 보릿가루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죽은 이들의 힘없는 머리들에게 간절히 빌며 약속했습니다. 이타카에 돌아가면 새끼 낳지 않은 소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홀에서 제물로 바치고 장작더미에 좋은 것들을 가득 쌓겠다고, 테이레시아스에게는 따로 우리 가축 가운데 가장 빼어난 온통 검은 숫양을 바치겠다고. 맹세와 기도로 죽은 이들의 무리에게 빌고 나서 나는 양들을 붙잡아 구덩이 위에서 목을 땄고, 검은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그러자 죽은 이들의 혼백이 에레보스에서 몰려나왔습니다. 신부들과 장가들지 못한 젊은이들, 고생을 많이 한 노인들, 갓 슬픔을 안은 여린 처녀들, 그리고 청동 날을 단 창에 찔린 숱한 사내들, 피 묻은 갑옷을 입은 채 싸움터에서 죽은 사내들이었습니다. 그 많은 혼백이 신묘한 울부짖음을 내며 구덩이 둘레로 여기저기서 몰려들자, 파랗게 질린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때 나는 전우들을 재촉하여, 무자비한 청동에 목이 따여 누워 있는 양들의 가죽을 벗겨 불태우고 신들께, 굳센 하데스와 무서운 페르세포네께 기도하라고 일렀습니다. 나 자신은 허벅지 곁에서 날카로운 칼을 뽑아 들고 앉아, 테이레시아스에게 묻기 전에는 죽은 이들의 힘없는 머리들이 피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51 맨 먼저 전우 엘페노르의 혼백이 왔습니다. 다른 일에 쫓기던 우리가 그의 몸을 울어 주지도 묻어 주지도 못한 채 키르케의 홀에 남겨 두고 왔으니, 그는 아직 길 넓은 땅 밑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그를 보자 나는 눈물이 났고 마음속으로 가엾게 여겼습니다. 나는 그에게 날개 돋친 말을 건넸습니다.
57 "엘페노르, 어떻게 이 안개 낀 어둠 속으로 왔나? 걸어온 자네가 검은 배를 탄 나보다 먼저 왔구먼."
59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는 울부짖으며 대답했습니다. "제우스의 핏줄, 라에르테스의 아들, 재간 많은 오디세우스여, 어떤 신이 내린 몹쓸 운명과 말할 수 없이 많은 술이 나를 미혹에 빠뜨렸소. 키르케의 집에서 누워 자다가 긴 사다리로 돌아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깜박 잊고 지붕에서 곧장 거꾸로 떨어졌소. 목뼈가 부러졌고, 내 혼백은 하데스로 내려왔소. 이제 여기 없는 이들, 뒤에 남은 이들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무릎을 잡고 비오. 당신 아내와, 어린 당신을 길러 준 아버지와, 당신이 홀에 홀로 두고 온 텔레마코스의 이름으로 비오. 당신이 이곳 하데스의 집을 떠나 잘 만든 배를 아이아이아섬에 대리라는 것을 나는 아오. 왕이여, 그곳에 가거든 부디 나를 기억해 주시오. 떠나면서 나를 울어 주지도 묻어 주지도 않은 채 버려두지 마시오. 내가 당신에게 신들의 노여움을 부르는 까닭이 되지 않도록 말이오. 내가 지녔던 무구와 함께 나를 태우고, 잿빛 바닷가에 무덤을 쌓아 주시오. 뒷사람들도 이 불운한 사내의 일을 알 수 있도록. 이 일을 다 해 주고, 살아서 내가 전우들과 함께 젓던 노를 내 무덤 위에 꽂아 주시오."
79 그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대답했습니다. "가엾은 사람, 자네를 위해 그 일을 다 이루어 주겠네."
81 우리 둘은 그렇게 슬픈 말을 주고받으며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한쪽에서 피 위로 칼을 뻗어 지키고 있었고, 맞은편에서는 전우의 허깨비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84 그때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혼백이 왔습니다. 기개 높은 아우톨리코스의 딸 안티클레이아였습니다. 내가 신성한 일리오스로 떠날 때는 살아 계셨던 분입니다. 어머니를 보자 나는 눈물이 났고 마음속으로 가엾게 여겼지만, 가슴이 몹시 아파도 테이레시아스에게 묻기 전에는 어머니가 먼저 피에 가까이 오시지 못하게 했습니다.
90 이윽고 테베의 테이레시아스의 혼백이 황금 왕홀을 들고 왔습니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 말했습니다. "제우스의 핏줄, 라에르테스의 아들, 재간 많은 오디세우스여, 가엾은 사람, 어찌하여 햇빛을 떠나 죽은 이들과 이 즐거움 없는 곳을 보러 왔느냐? 자, 구덩이에서 물러서고 날카로운 칼을 치워라. 내가 피를 마시고 그대에게 숨김없는 사실을 말해 주겠다."
97 그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뒤로 물러서서 은못 박은 칼을 칼집에 꽂아 넣었습니다. 그가 검은 피를 마시고 나자, 나무랄 데 없는 예언자가 내게 말했습니다.
100 "빛나는 오디세우스, 그대는 꿀처럼 달콤한 귀향을 찾고 있지만 신이 그 길을 고되게 만들 것이다. 땅을 뒤흔드는 신이 그대를 잊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대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눈을 멀게 했다고 노하여, 그는 마음속에 앙심을 품었다. 그래도 그대가 그대 마음과 전우들의 마음을 억누르기만 한다면, 비록 고통을 겪더라도 그대들은 아직 고향에 닿을 수 있다. 그대가 보랏빛 바다를 벗어나 잘 만든 배를 트리나키아섬에 처음 댈 때, 그대들은 거기서 풀을 뜯는 헬리오스의 소와 살진 양을 보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모든 것을 듣는 헬리오스의 가축이다. 그대가 그것들을 해치지 않고 귀향만 생각한다면, 비록 고통을 겪더라도 그대들은 아직 이타카에 닿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해친다면, 그때는 그대의 배와 전우들에게 파멸이 닥칠 것이라고 나는 예언한다. 그대 자신은 설령 벗어난다 해도, 전우들을 모두 잃고 남의 배를 얻어 타고 뒤늦게 비참하게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집에 가서도 재앙을 만날 것이다. 방자한 사내들이 신에 버금가는 그대의 아내에게 구혼하며 구혼 선물을 내밀고, 그대의 살림을 먹어 치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돌아가서 그들의 폭력을 갚아 줄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홀에서 꾀로든 드러내 놓고 날카로운 청동으로든 구혼자들을 죽이고 나면, 손에 잘 맞는 노를 하나 들고 길을 떠나거라. 바다를 모르고 소금 섞인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를 때까지 가거라. 그들은 뺨을 붉게 칠한 배도, 배의 날개인 손에 잘 맞는 노도 모른다. 그대에게 아주 뚜렷한 표지를 일러 주마. 그대가 놓치지 않을 표지다. 길에서 마주친 다른 나그네가 그대더러 빛나는 어깨에 곡식을 까부르는 넉가래를 메고 있다고 말하거든, 그때 손에 잘 맞는 노를 땅에 꽂고, 포세이돈 왕께 숫양과 황소와 암퇘지를 올라타는 수퇘지를 훌륭한 제물로 바쳐라.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가, 넓은 하늘에 사는 불사의 신들께 차례대로 빠짐없이 신성한 큰 제물을 바쳐라. 그대에게는 바다에서 아주 부드러운 죽음이 찾아와, 넉넉한 노년에 지친 그대를 데려갈 것이다. 그대 둘레의 백성은 복을 누릴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이르는 것은 숨김없는 사실이다."
138 그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대답했습니다. "테이레시아스여, 이 일들은 신들께서 몸소 실을 자아 정해 두신 일이겠습니다. 자, 이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숨김없이 낱낱이. 저기 돌아가신 제 어머니의 혼백이 보입니다. 피 가까이 말없이 앉아 계신데, 제 아들을 마주 보지도 말을 건네지도 못하십니다. 어르신, 어떻게 하면 어머니가 저를 알아보실 수 있을지 말씀해 주십시오."
145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가 곧 대답했습니다. "쉬운 말을 일러 주어 그대 마음에 새겨 주마. 죽은 이들 가운데 그대가 피 가까이 오게 하는 이는 그대에게 숨김없는 사실을 말할 것이고, 그대가 막는 이는 다시 물러갈 것이다."
150 이렇게 말하고 테이레시아스 어른의 혼백은 예언을 다 들려준 뒤 하데스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머물러 있었고, 마침내 어머니가 와서 검은 피를 마시더니 곧 나를 알아보고 울부짖듯 날개 돋친 말을 건넸습니다.
155 "내 아들아, 산 몸으로 어떻게 이 안개 낀 어둠 속으로 왔느냐? 산 사람이 이곳을 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 사이에는 큰 강들과 무서운 물줄기들이 가로놓여 있고, 무엇보다 먼저 오케아노스가 있어서 잘 만든 배가 없으면 걸어서는 도무지 건널 수 없다. 이제야 트로이에서 배와 전우들과 함께 오랫동안 떠돌다가 여기 온 것이냐? 아직 이타카에 가지 못했고, 홀에서 아내도 보지 못했느냐?"
163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대답했습니다. "어머니, 테베의 테이레시아스의 혼백에게 신탁을 물어야 할 일이 있어 하데스에게 내려왔습니다. 저는 아직 아카이아 땅 가까이 가지도 못했고 우리 땅을 밟지도 못했습니다. 트로이인과 싸우려고 고귀한 아가멤논을 따라 좋은 말이 많은 일리오스로 처음 길을 나선 뒤로, 저는 늘 고난을 겪으며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자, 이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숨김없이 낱낱이. 긴 슬픔을 안기는 죽음의 어떤 운명이 어머니를 쓰러뜨렸습니까? 오랜 병이었습니까, 아니면 화살을 쏟아붓는 아르테미스가 찾아와 부드러운 화살로 쏘아 죽였습니까? 제가 두고 온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도 해 주십시오. 제 명예의 몫이 아직 그들 곁에 있는지, 아니면 벌써 다른 사내가 그것을 차지하고 제가 더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들 하는지. 버젓이 혼례를 올려 맞은 제 아내의 뜻과 생각도 말씀해 주십시오. 아들 곁에 머물며 모든 것을 굳게 지키고 있는지, 아니면 벌써 아카이아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가 아내로 맞아 갔는지."
180 내가 이렇게 말하자 존귀한 어머니가 곧 대답했습니다. "그 여인은 참는 마음으로 네 홀에 꿋꿋이 머물러 있고, 밤이고 낮이고 눈물을 쏟으며 비참하게 시들어 간다. 네 아름다운 명예의 몫은 아직 아무도 차지하지 못했다. 텔레마코스가 평온하게 성역의 땅을 거두고, 재판하는 사내라면 마땅히 베풀어야 할 고루 나눈 잔치를 벌인다. 모두가 그를 부르니까. 네 아버지는 그곳 시골에 머물며 도시로 내려오지 않는다. 그에게는 침대도 외투도 반들거리는 깔개도 잠자리로 없다. 겨울이면 집 안에서 종들이 자는 곳, 불 가까운 잿더미 속에서 자고 살갗에는 남루한 옷을 걸친다. 여름이 오고 무르익은 가을이 오면, 포도밭 비탈 여기저기에 떨어진 나뭇잎을 쌓아 낮은 잠자리를 마련한다. 거기 누워 그는 슬퍼하며 네 귀향을 그리고, 가슴속 슬픔을 키운다. 그에게 고된 노년이 닥쳤다. 나도 그렇게 죽었고 그렇게 운명을 맞았다. 눈 밝은, 화살을 쏟아붓는 여신이 홀에 찾아와 부드러운 화살로 나를 쏘아 죽인 것도 아니고, 끔찍하게 시들게 하여 팔다리에서 목숨을 앗아 가곤 하는 병이 나를 찾아온 것도 아니다. 빛나는 오디세우스야, 너를 그리는 마음과 네 슬기와 네 다정함이 꿀처럼 달콤한 내 목숨을 앗아 갔다."
204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혼백을 끌어안고 싶어졌습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세 번 다가가 끌어안으려 했지만, 어머니는 세 번 다 그림자처럼, 꿈처럼 내 손에서 빠져나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내 가슴속에서 날카로운 슬픔이 더욱 커졌고, 나는 어머니에게 날개 돋친 말을 건넸습니다.
210 "어머니, 붙잡으려고 이렇게 애쓰는 저를 왜 기다려 주지 않으십니까? 하데스에서나마 서로 두 팔로 끌어안고 차가운 울음을 실컷 울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아니면 위엄 있는 페르세포네가 저를 더 슬피 울며 탄식하게 하려고 이 허깨비를 제게 보냈습니까?"
215 내가 이렇게 말하자 존귀한 어머니가 곧 대답했습니다. "아아, 내 아들아,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운한 아이야, 제우스의 딸 페르세포네가 너를 속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으면 이렇게 되니, 이것이 인간의 법도이다. 힘줄이 더는 살과 뼈를 붙들고 있지 않고, 목숨이 흰 뼈를 떠나자마자 타오르는 불의 거센 기운이 그것들을 사그라뜨린다. 혼백은 꿈처럼 날아가 이리저리 떠돈다. 어서 빨리 햇빛 쪽으로 돌아가거라. 이 모든 것을 알아 두었다가 나중에 네 아내에게 들려주어라."
225 우리 둘이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 위엄 있는 페르세포네가 부추겨 보낸 여인들, 영웅들의 아내와 딸이었던 여인들이 모두 왔습니다. 여인들은 검은 피 둘레에 떼 지어 모여들었고, 나는 어떻게 하면 하나하나에게 물어볼 수 있을지 궁리했습니다. 내 마음에는 이것이 가장 좋은 계책으로 보였습니다. 나는 튼튼한 허벅지 곁에서 날이 긴 칼을 뽑아 들고, 모두가 한꺼번에 검은 피를 마시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여인들이 차례로 다가와 저마다 제 가문을 밝혔고, 나는 모두에게 하나하나 물었습니다.
235 거기서 나는 맨 먼저 지체 높은 아버지의 딸 티로를 보았습니다. 티로는 나무랄 데 없는 살모네우스의 자식이라고 하고, 아이올로스의 아들 크레테우스의 아내였다고 했습니다. 티로는 신 같은 강 에니페우스를 사랑했습니다. 땅 위를 흐르는 강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강이었는데, 티로는 에니페우스의 아름다운 물줄기를 자주 찾아갔습니다. 대지를 떠받치는, 땅을 뒤흔드는 신이 그 강의 모습을 하고 소용돌이치는 강어귀에서 티로 곁에 누웠습니다. 산만 한 자줏빛 물결이 활처럼 휘어 둘레에 솟아올라 신과 죽을 운명의 여인을 감추었고, 신은 처녀의 띠를 풀고 잠을 쏟아부었습니다. 사랑의 일을 다 마치자 신은 티로의 손을 꼭 잡고 이름을 부르며 말했습니다.
248 "여인아, 이 사랑을 기뻐하여라. 한 해가 돌아오면 그대는 빛나는 자식들을 낳을 것이다. 불사의 신들과 함께한 잠자리는 헛되지 않으니까. 그대는 그 아이들을 보살펴 길러라. 이제 집으로 돌아가되 입을 다물고 내 이름을 말하지 마라. 나는 대지를 흔드는 포세이돈이다."
253 이렇게 말하고 신은 물결치는 바다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티로는 아이를 배어 펠리아스와 넬레우스를 낳았고, 두 아들은 모두 위대한 제우스의 굳센 시종이 되었습니다. 펠리아스는 땅이 넓은 이올코스에서 양을 많이 치며 살았고, 넬레우스는 모래 많은 필로스에서 살았습니다. 여인들의 여왕인 티로는 크레테우스에게도 아이손과 페레스와 전차 타고 싸우기를 즐기는 아미타온을 낳아 주었습니다.
260 그다음에는 아소포스강의 딸 안티오페를 보았습니다. 안티오페는 제우스의 품에서도 잠을 잤다고 자랑했고, 두 아들 암피온과 제토스를 낳았습니다. 둘 다 힘이 셌어도 땅이 넓은 테베에 성탑 없이는 살 수 없었으므로, 이들은 처음으로 일곱 성문의 테베에 터전을 닦고 성탑을 둘렀습니다.
266 그다음에는 암피트리온의 아내 알크메네를 보았습니다. 알크메네는 위대한 제우스의 품에 안겨, 대담하게 버티는 사자의 마음을 지닌 헤라클레스를 낳았습니다. 기세 높은 크레온의 딸 메가라도 보았는데, 기운이 지칠 줄 모르는 암피트리온의 아들이 아내로 맞은 여인이었습니다.
271 오이디푸스의 어머니, 아름다운 에피카스테도 보았습니다. 에피카스테는 알지 못한 채 제 아들과 혼인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으니, 아들은 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했고 신들은 곧 그 일을 사람들에게 드러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신들의 끔찍한 뜻 때문에 사랑스러운 테베에서 고통을 겪으며 카드모스의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에피카스테는 슬픔에 사로잡혀 높은 들보에 올가미를 높이 걸어 목을 매고, 굳센 문지기 하데스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는 어머니의 에리니에스가 이루어 내는 숱한 고통을 남겼습니다.
281 더없이 아름다운 클로리스도 보았습니다. 오래전 넬레우스가 그 아름다움에 반해 셀 수 없이 많은 구혼 선물을 주고 아내로 맞은 여인이었습니다. 클로리스는 한때 미니아이족의 오르코메노스를 힘으로 다스린 이아소스의 아들 암피온의 막내딸이었습니다. 클로리스는 필로스의 왕비가 되어 넬레우스에게 빛나는 자식들, 네스토르와 크로미오스와 늠름한 페리클리메노스를 낳아 주었습니다. 이들 다음으로 기품 있는 페로를 낳았는데, 보는 이마다 감탄하는 처녀였습니다. 이웃에 사는 이들이 모두 페로에게 구혼했지만, 넬레우스는 이피클로스의 힘이 지키는 뿔 굽고 이마 넓은 소 떼를 필라케에서 몰고 오지 못하는 자에게는 딸을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다루기 어려운 소들이었습니다. 나무랄 데 없는 예언자 하나만이 그 소들을 몰아 오겠다고 나섰지만, 신이 정한 모진 운명과 끔찍한 사슬과 들판의 소치기들이 그를 붙잡아 두었습니다. 그러다 달이 차고 날이 다 지나 한 해가 돌아오고 계절이 다시 찾아오자, 마침내 이피클로스의 힘이 신의 뜻을 모두 일러 준 그를 풀어 주었고, 그렇게 제우스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298 틴다레오스의 아내 레다도 보았습니다. 레다는 틴다레오스에게 마음 굳센 두 아들, 말을 길들이는 카스토르와 주먹 싸움에 뛰어난 폴리데우케스를 낳아 주었습니다. 생명을 키우는 땅이 두 사람을 산 채로 품고 있었으니, 그들은 땅 밑에서도 제우스에게서 명예를 받아 하루씩 번갈아 어떤 날은 살아 있고 어떤 날은 다시 죽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들과 같은 명예를 몫으로 받았습니다.
305 그다음에는 알로에우스의 아내 이피메데이아를 보았습니다. 이피메데이아는 포세이돈과 살을 섞었다고 했고, 신에 버금가는 오토스와 멀리까지 이름난 에피알테스, 두 아들을 낳았지만 둘 다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곡식을 내는 땅이 기른 이들 가운데 그들이 가장 키가 컸고, 이름난 오리온 다음으로는 가장 잘생겼습니다. 아홉 살에 이미 몸통 너비가 아홉 자, 키가 아홉 발이었습니다. 그들은 올림포스의 불사의 신들에게까지 소란한 전쟁의 싸움을 일으키겠다고 을러댔고, 하늘에 오를 수 있도록 올림포스 위에 오사산을, 오사산 위에 잎이 흔들리는 펠리온산을 쌓으려 했습니다. 그들이 한창때에 이르렀더라면 그 일을 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 고운 레토가 낳은 제우스의 아들이, 그들의 관자놀이 밑에 구레나룻이 돋고 턱이 고운 솜털로 덮이기도 전에 둘을 죽였습니다.
321 파이드라와 프로크리스와, 흉한 마음을 품은 미노스의 딸 아름다운 아리아드네도 보았습니다. 테세우스가 일찍이 아리아드네를 크레타에서 신성한 아테네의 언덕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그 전에 디오니소스의 고발로 아르테미스가 바닷물이 사방을 감싼 디아섬에서 아리아드네를 죽였으니 함께 살아 보지 못했습니다.
326 마이라와 클리메네와, 사랑하는 남편을 팔고 값진 황금을 받은 가증스러운 에리필레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본 영웅들의 아내와 딸들을 모두 이야기하고 이름을 다 댈 수는 없습니다. 그 전에 거룩한 밤이 다 가 버릴 것입니다. 이제는 잘 시간입니다. 날랜 배로 전우들에게 가든 여기서 자든 말입니다. 나를 바래다주는 일은 신들과 여러분이 맡아 주실 것입니다.
333 그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 숨을 죽이고 잠잠해졌다. 그늘진 홀 안의 사람들은 이야기에 홀린 채 꼼짝하지 않았다. 하얀 팔의 아레테가 먼저 말을 꺼냈다.
336 "파이아케스인들이여, 이 사내가 여러분 눈에는 어떻게 보이오? 생김새와 키와 속에 든 고른 생각이 말이오. 더욱이 이 사람은 내 손님이오. 그러나 여러분도 저마다 그 명예를 나누어 가지고 있소. 그러니 서둘러 떠나보내지 말고, 이토록 아쉬운 처지의 사람에게 선물을 아끼지 마시오. 신들의 뜻으로 여러분의 홀에는 재물이 많이 쌓여 있소."
342 그들 가운데서 늙은 영웅 에케네오스도 말했다. 파이아케스 사람들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은 이였다. "벗들이여, 사려 깊은 왕비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짐작하고 생각한 바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소. 그 말씀을 따릅시다. 그러나 행동도 말도 여기 계신 알키노오스께 달려 있소."
347 알키노오스가 대답했다. "내가 살아서 노 젓기를 좋아하는 파이아케스인을 다스리는 한, 그 말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오. 손님은 귀향을 몹시 바라겠지만, 그래도 내가 선물을 모두 마련할 때까지 내일까지는 참고 머물러 주시오. 그를 바래다주는 일은 모든 사내가, 그리고 누구보다 내가 맡을 것이오. 이 고장의 힘은 내게 있으니 말이오."
354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대답했다. "알키노오스 왕이시여, 모든 백성 가운데 우뚝하신 분이여, 여러분이 나더러 한 해라도 이곳에 머물라 하시고, 바래다줄 채비를 서둘러 주시며 빛나는 선물을 주신다면 나는 그것도 바라겠습니다. 손에 더 많은 것을 들고 사랑하는 고향 땅에 닿는다면 그편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돌아온 것을 이타카에서 보는 모든 사람에게 더 존경받고 더 사랑받을 것입니다."
362 알키노오스가 대답했다. "오디세우스, 우리가 보기에 당신은 결코 사기꾼이나 협잡꾼이 아니오. 검은 땅은 널리 흩어져 사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길러 내지만, 그들은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데서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들이오. 그러나 당신의 말에는 고운 맵시가 있고, 그 안에는 훌륭한 생각이 들어 있소. 당신은 노래꾼처럼 솜씨 있게, 모든 아르고스인과 당신 자신이 겪은 비참한 시름을 이야기해 주었소. 자, 이것을 말해 주시오. 숨김없이 낱낱이. 당신과 함께 일리오스로 갔다가 거기서 운명을 맞은 신에 버금가는 전우들 가운데 누구를 보았소? 이 밤은 참으로 길고 끝이 없소. 아직 홀에서 잠자리에 들 때가 아니오. 그 놀라운 일들을 내게 들려주시오. 당신이 홀에서 당신의 시름을 견디며 이야기해 준다면, 나는 고귀한 새벽 여신이 올 때까지라도 견딜 수 있소."
377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대답했다. "알키노오스 왕이시여, 모든 백성 가운데 우뚝하신 분이여, 긴 이야기를 할 때가 있고 잠을 잘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왕께서 아직 더 듣기를 바라신다면, 나는 이보다 더 가엾은 다른 이야기도 마다하지 않고 들려드리겠습니다. 뒤에 죽은 내 전우들의 시름 말입니다. 그들은 트로이인의 비통한 함성은 벗어났지만, 못된 여인의 뜻 때문에 귀향길에 죽었습니다."
385 순결한 페르세포네가 여인들의 혼백을 여기저기로 흩어 보내자,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의 혼백이 슬픔에 잠겨 왔습니다. 그와 함께 아이기스토스의 집에서 죽어 운명을 맞은 다른 이들의 혼백이 그 둘레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는 검은 피를 마시자 곧 나를 알아보고, 굵은 눈물을 쏟으며 소리 높여 울면서 나를 붙잡으려고 두 팔을 뻗었지만, 그에게는 예전에 굽은 팔다리에 깃들어 있던 단단한 힘도 기운도 더는 없었습니다.
395 그를 보자 나는 눈물이 났고 마음속으로 가엾게 여겼습니다. 나는 그에게 날개 돋친 말을 건넸습니다. "더없이 영광스러운 아트레우스의 아들,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이여, 긴 슬픔을 안기는 죽음의 어떤 운명이 당신을 쓰러뜨렸소? 포세이돈이 끔찍한 바람의 거센 입김을 일으켜 배 위에서 당신을 쓰러뜨렸소? 아니면 뭍에서 소 떼와 아름다운 양 떼를 몰아가려다가, 혹은 도시와 여인들을 두고 싸우다가 사나운 사내들에게 해를 입었소?"
404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가 곧 대답했습니다. "제우스의 핏줄, 라에르테스의 아들, 재간 많은 오디세우스여, 포세이돈이 끔찍한 바람의 거센 입김을 일으켜 배 위에서 나를 쓰러뜨린 것도 아니고, 뭍에서 사나운 사내들이 나를 해친 것도 아니오. 아이기스토스가 내게 죽음과 운명을 꾸며 저주받을 아내와 함께 나를 죽였소. 나를 집으로 불러 저녁을 먹이고는, 누가 구유 곁에서 소를 잡듯이 죽였소. 그렇게 나는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전우들도 내 둘레에서 쉴 새 없이 죽어 갔소. 큰 권세를 지닌 부자의 집에서 혼인 잔치나 추렴 잔치나 풍성한 잔치를 벌일 때면 흰 엄니의 돼지들을 잡소. 꼭 그처럼 전우들이 도륙되었소. 당신은 이미 숱한 사내들의 죽음을 보았소. 한 사람씩 쓰러지는 것도, 거센 싸움판에서 죽어 가는 것도 보았소. 그러나 그 광경을 보았다면 당신도 마음속으로 무엇보다 슬퍼했을 것이오. 술동이와 음식이 가득한 식탁 둘레에 우리가 홀 안에 쓰러져 누워 있었고, 바닥은 온통 피로 끓어올랐소. 나는 프리아모스의 딸 카산드라의 가장 애처로운 목소리도 들었소. 꾀가 음흉한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내 곁에서 그 여인을 죽였소. 나는 칼에 찔려 죽어 가면서 손을 들어 땅을 쳤소. 그런데 낯 두꺼운 그 여인은 나를 버려두고 가 버렸소. 내가 하데스로 가는데도 손으로 내 눈을 감겨 주지도, 입을 다물려 주지도 않았소. 이처럼 마음속에 그런 짓을 품는 여인보다 더 끔찍하고 더 염치없는 것은 없소. 그 여인이 꾸민 짓이 바로 그렇게 몹쓸 짓이었소. 버젓이 혼례를 올린 제 남편을 죽일 꾀를 꾸몄으니 말이오. 나는 자식들과 종들에게 반가운 얼굴로 집에 돌아가리라 생각했소. 그런데 그 여인은 더없이 흉한 일을 꾸며 제 몸에 치욕을 끼얹었고, 뒷날의 여인들에게도, 행실 바른 여인에게까지 치욕을 남겼소."
435 그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대답했습니다. "아아, 멀리 내다보는 제우스께서는 처음부터 여인들의 꾀를 빌려 아트레우스의 핏줄을 지독하게도 미워하셨구려. 헬레네 때문에 우리가 숱하게 죽었고, 당신이 멀리 나가 있는 동안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당신을 칠 덫을 꾸몄으니 말이오."
440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가 곧 대답했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아내에게 너무 너그럽게 굴지 마시오. 잘 아는 일이라도 아내에게 모두 털어놓지 말고, 어떤 것은 말하되 어떤 것은 숨겨 두시오. 그러나 오디세우스, 당신은 아내 손에 죽지는 않을 것이오. 이카리오스의 딸, 사려 깊은 페넬로페는 참으로 슬기롭고 속으로 좋은 생각을 품을 줄 아는 여인이오. 우리가 싸움터로 떠날 때 그 여인은 갓 혼인한 새색시였고, 품에는 젖먹이 아들이 안겨 있었소. 그 아이는 지금쯤 사내들 축에 끼어 앉아 있겠지. 복 받은 아이요. 사랑하는 아버지가 돌아와 그 아이를 보고, 그 아이는 아버지를 끌어안을 테니 말이오. 그것이 도리이니. 그런데 내 아내는 내 아들을 실컷 바라볼 틈도 주지 않고, 그 전에 나를 죽여 버렸소. 또 한 가지 일러 줄 테니 가슴에 새겨 두시오. 사랑하는 고향 땅에 배를 댈 때는 드러내 놓지 말고 몰래 대시오. 이제 여인들은 믿을 수가 없소. 자, 이것을 말해 주시오. 숨김없이 낱낱이. 오르코메노스에서든, 모래 많은 필로스에서든, 넓은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 곁에서든, 혹시 내 아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소? 고귀한 오레스테스는 아직 땅 위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오."
462 그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대답했습니다. "아트레우스의 아들이여, 어찌하여 내게 그런 것을 묻소?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나는 조금도 모르오. 바람 같은 헛말을 하는 것은 좋지 않소."
465 우리 둘은 그렇게 슬픈 말을 주고받으며, 굵은 눈물을 쏟으면서 비통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때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혼백과 파트로클로스와 나무랄 데 없는 안틸로코스와 아이아스의 혼백이 왔습니다. 아이아스는 나무랄 데 없는 펠레우스의 아들 다음으로는 다른 모든 다나오스인 가운데 생김새도 몸집도 가장 빼어난 이였습니다. 발 빠른 아이아코스의 손자의 혼백이 나를 알아보고, 울부짖듯 날개 돋친 말을 건넸습니다.
473 "제우스의 핏줄, 라에르테스의 아들, 재간 많은 오디세우스여, 모진 사람, 이번에는 또 무슨 더 큰 일을 속으로 꾸미는 것이오? 생각 없는 죽은 이들, 지쳐 쓰러진 인간들의 허깨비가 사는 하데스로 어떻게 감히 내려왔소?"
477 그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대답했습니다.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여, 아카이아인 가운데 단연 으뜸인 이여, 나는 테이레시아스에게 물을 일이 있어 왔소. 험한 이타카에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지 무슨 계책을 일러 줄까 해서였소. 나는 아직 아카이아 땅 가까이 가지도 못했고 우리 땅을 밟지도 못했소. 늘 재앙을 겪고 있소. 그러나 아킬레우스, 당신보다 더 복 받은 사내는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오. 당신이 살아 있을 때 우리 아르고스인은 당신을 신들과 똑같이 받들었고, 지금은 이곳에서 죽은 이들 사이에 큰 힘을 떨치고 있으니 말이오. 그러니 아킬레우스, 죽었다고 조금도 슬퍼하지 마시오."
487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가 곧 대답했습니다. "빛나는 오디세우스, 내게 죽음을 달래는 말은 하지 마시오. 죽어 스러진 모든 이들을 다스리느니, 차라리 살림이 넉넉지 못한 땅 없는 사내 밑에서 남의 땅을 부치는 품팔이가 되고 싶소. 자, 내 당당한 아들 소식을 들려주시오. 그 아이가 맨 앞에서 싸우려고 싸움터에 나갔는지 아닌지. 나무랄 데 없는 펠레우스에 대해서도 무슨 소식을 들었거든 말해 주시오. 아직도 많은 미르미돈족 사이에서 명예를 누리고 있는지, 아니면 노년이 손발을 묶어 놓아 헬라스와 프티아에서 사람들이 그분을 업신여기는지. 나는 이제 햇빛 아래에서 그분을 도와 드릴 수 없으니 말이오. 넓은 트로이 땅에서 아르고스인을 지키며 가장 뛰어난 적들을 죽이던 그때의 내가 아니오. 그때 같은 몸으로 잠깐이라도 아버지의 집에 갈 수만 있다면, 그분께 폭력을 휘두르고 명예를 빼앗는 자들은 누구든 내 기운과 당해 낼 수 없는 내 손에 질겁하게 해 줄 텐데."
504 그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대답했습니다. "나무랄 데 없는 펠레우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소. 그러나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에 대해서는 당신이 묻는 대로 숨김없이 모두 이야기하겠소. 내가 몸소 그를 균형 잡힌 우묵한 배에 태워 스키로스에서 정강이받이를 잘 댄 아카이아인에게로 데려갔소. 트로이 도시를 두고 우리가 계책을 의논할 때면 그는 늘 맨 먼저 말했고, 말을 그르치는 법이 없었소. 그를 이기는 이는 신에 버금가는 네스토르와 나 둘뿐이었소. 트로이인의 들판에서 청동을 들고 싸울 때면, 그는 사내들의 무리 속이나 떼 지은 군사들 틈에 머물러 있지 않았소. 누구에게도 제 기운을 굽히지 않고 훨씬 앞서 내달려, 끔찍한 싸움판에서 숱한 사내들을 죽였소. 그가 아르고스인을 지키며 죽인 사람들을 모두 이야기하고 이름을 다 댈 수는 없소. 그러나 텔레포스의 아들, 영웅 에우리필로스를 청동으로 쓰러뜨린 일만은 말하겠소. 그 둘레에서 그의 전우인 케테이오이족이 여인에게 바친 선물 때문에 숱하게 죽어 갔소. 그는 고귀한 멤논 다음으로 내가 본 가장 잘생긴 사내였소. 우리 아르고스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들이 에페이오스가 만든 말 속으로 내려갔을 때, 촘촘한 매복처의 문을 열고 닫는 일은 모두 내게 맡겨져 있었소. 그때 다른 다나오스인의 지도자들과 통치자들은 눈물을 훔쳤고 저마다 팔다리를 떨었소. 그러나 그가 고운 얼굴빛이 하얘지거나 뺨에서 눈물을 훔치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소. 그는 말에서 나가게 해 달라고 내게 거듭 졸랐고, 칼자루와 청동이 묵직한 창을 더듬으며 트로이인에게 재앙을 안길 생각만 했소. 그리고 우리가 프리아모스의 가파른 도시를 무너뜨렸을 때, 그는 제 몫과 훌륭한 명예의 선물을 받아 상처 하나 없이 배에 올랐소. 날카로운 청동에 맞지도 않았고 가까이 붙어 싸우다 찔리지도 않았소. 싸움에서는 흔히 그런 일이 생기는 법인데 말이오. 아레스는 가리지 않고 미쳐 날뛰니까."
538 내가 이렇게 말하자 발 빠른 아이아코스의 손자의 혼백은, 내가 그의 아들이 빼어나다고 말해 준 것이 기뻐 아스포델 풀밭을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541 죽은 이들의 다른 혼백들은 슬픔에 잠겨 서서 저마다 제 시름을 물었습니다. 오직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의 혼백만이, 배들 곁에서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두고 판정을 다투었을 때 내가 그를 이긴 일로 아직도 노하여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습니다. 그 무구는 아킬레우스의 존귀한 어머니가 상으로 내놓았고, 트로이인의 아들들과 팔라스 아테나가 판정했습니다. 그런 시합에서 이기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 무구 때문에 땅이 그토록 훌륭한 사람, 아이아스를 덮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아이아스는 나무랄 데 없는 펠레우스의 아들 다음으로는 다른 모든 다나오스인 가운데 생김새도 무공도 뛰어난 이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상냥한 말로 말을 걸었습니다.
553 "나무랄 데 없는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여, 그 저주받을 무구 때문에 품은 노여움을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것이오? 신들은 그 무구로 아르고스인에게 재앙을 내렸소. 당신 같은 성탑을 그들이 잃었으니 말이오. 우리 아카이아인은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죽음만큼이나 당신의 죽음을 줄곧 슬퍼하고 있소.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오. 제우스께서 창 잘 쓰는 다나오스인의 군대를 지독하게 미워하시어 당신에게 그 운명을 지우셨소. 자, 왕이여, 이리 와서 내 말과 이야기를 들어 보시오. 당신의 기운과 굳센 마음을 누그러뜨리시오."
563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죽은 이들의 다른 혼백들을 따라 에레보스로 가 버렸습니다. 그래도 그가 노한 채로나마 내게 말을 걸었거나 내가 그에게 말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가슴속 마음은 죽은 다른 이들의 혼백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568 거기서 나는 제우스의 빛나는 아들 미노스를 보았습니다. 그는 황금 왕홀을 들고 앉아 죽은 이들에게 판결을 내리고 있었고, 죽은 이들은 문이 넓은 하데스의 집에서 앉거나 서서 왕 둘레에 모여 판결을 구했습니다.
572 그다음에는 거대한 오리온을 보았습니다. 그는 아스포델 풀밭에서 들짐승들을 몰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외딴 산에서 온통 청동으로 된, 결코 부러지지 않는 몽둥이를 손에 들고 몸소 잡았던 짐승들이었습니다.
576 영광스러운 대지의 아들 티티오스도 보았습니다. 그는 땅바닥에 아홉 마지기에 걸쳐 누워 있었습니다. 독수리 두 마리가 양쪽에 앉아 뱃가죽 안으로 파고들어 간을 쪼고 있었는데, 그는 손으로 쫓아내지도 못했습니다. 일찍이 제우스의 영광스러운 아내 레토가 춤마당 아름다운 파노페우스를 지나 피토로 갈 때 티티오스가 레토를 겁탈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582 지독한 고통을 겪는 탄탈로스도 보았습니다. 그는 호수 안에 서 있었고, 물이 턱까지 차올라 있었습니다. 그는 목이 말라 애를 썼지만 물을 떠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노인이 마시려고 몸을 숙일 때마다 물은 빨려 들어가 사라졌고, 발밑에는 검은 땅이 드러났습니다. 어떤 신이 물을 말려 버렸습니다. 잎이 높이 우거진 나무들, 배나무와 석류나무, 열매가 탐스러운 사과나무, 달콤한 무화과나무, 무성한 올리브나무가 머리 위로 열매를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인이 손으로 잡으려고 손을 뻗을 때마다, 바람이 그것들을 그늘진 구름으로 휙 날려 버렸습니다.
593 지독한 고통을 겪는 시시포스도 보았습니다. 그는 두 손으로 거대한 바위를 붙들고 손과 발로 버티며 그 바위를 언덕 위로 밀어 올리곤 했지만, 막 꼭대기를 넘기려 할 때면 거센 무게가 바위를 되돌려 놓았고, 뻔뻔한 바위는 다시 들판으로 굴러 내려갔습니다. 그러면 그는 다시 온 힘을 다해 밀어 올렸고, 팔다리에서는 땀이 흘러내리고 머리 위로는 흙먼지가 피어올랐습니다.
601 그다음에는 힘센 헤라클레스를 보았습니다. 다만 그의 허깨비였습니다. 그 자신은 불사의 신들과 함께 잔치를 즐기며, 위대한 제우스와 황금 신을 신은 헤라의 딸, 발목 고운 헤베를 아내로 두고 있었습니다. 그의 둘레에서는 죽은 이들이 새 떼처럼 사방으로 질겁하며 아우성쳤습니다. 그는 캄캄한 밤 같은 모습으로, 덮개 벗긴 활에 화살을 메긴 채 언제라도 쏠 듯이 무섭게 둘레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가슴에는 무시무시한 황금 칼끈을 두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곰과 멧돼지와 눈 번득이는 사자들, 접전과 싸움과 살육과 사람 죽이는 일 같은 놀라운 그림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칼끈을 솜씨껏 지어낸 장인은 다시는 그런 것을 짓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나를 눈으로 보자마자 알아보고, 울부짖듯 날개 돋친 말을 건넸습니다.
617 "제우스의 핏줄, 라에르테스의 아들, 재간 많은 오디세우스여, 아, 가엾은 사람, 그대도 내가 햇빛 아래에서 짊어졌던 것 같은 몹쓸 운명을 끌고 다니는구나. 나는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의 아들이었지만 끝없는 고난을 겪었다. 나보다 훨씬 못난 사내에게 매여, 그자가 내게 모진 시련을 시켰다. 한번은 그 개를 끌고 오라고 나를 이리로 보냈다. 이보다 더 힘든 시련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게지. 그러나 나는 그 개를 하데스에게서 끌어 올려 데려갔다. 헤르메스와 빛나는 눈의 아테나가 나를 이끌어 주었다."
627 이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하데스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머물러, 옛날에 죽은 영웅들 가운데 누가 또 오지 않을까 기다렸으니, 그랬다면 내가 보고 싶던 더 옛사람들, 신들의 영광스러운 자식인 테세우스와 페이리토오스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셀 수 없는 죽은 이들의 무리가 신묘한 소리를 내며 몰려들었고, 파랗게 질린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위엄 있는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서 무시무시한 괴물 고르고의 머리를 내게 보낼까 두려웠습니다.
636 나는 곧 배로 가서 전우들에게 배에 오르고 고물 밧줄을 풀라고 일렀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배에 올라 노 젓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물살의 물결이 배를 오케아노스강을 따라 실어 갔습니다. 처음에는 노질로, 나중에는 고운 순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