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권
1 빛나는 눈의 여신 아테나가 이카리오스의 딸, 사려 깊은 페넬로페의 마음에 한 가지 생각을 넣어 주었다. 오디세우스의 홀에서 구혼자들 앞에 활과 잿빛 쇠를 내놓으라는 생각, 시합 거리이자 살육의 시작이 될 생각이었다. 페넬로페는 제 집의 높은 층계를 올라가 아름다운 청동 열쇠를 억센 손으로 집어 들었다. 상아 손잡이가 달린, 잘 휜 열쇠였다. 페넬로페는 시녀들과 함께 맨 안쪽 방으로 갔다. 그곳에는 주인의 보물인 청동과 황금과 공들여 벼린 쇠가 놓여 있었고, 뒤로 휜 활과 화살 담는 화살통도 놓여 있었다. 화살통에는 신음을 부르는 화살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것들은 불사의 신들과 닮은 에우리토스의 아들 이피토스가 스파르타에서 오디세우스를 만나 준 선물이었다. 두 사람은 메세네에서, 슬기로운 오르틸로코스의 집에서 서로 만났다. 메세네 사람들이 노 젓는 자리가 많은 배를 타고 와서 이타카에서 양 삼백 마리와 목동들을 실어 간 일이 있어서, 오디세우스는 그 고장 사람 모두가 갚아야 할 빚을 받으러 그곳에 갔다. 그 일 때문에 아버지와 다른 원로들이 그를 보내, 오디세우스는 아직 어린 나이에 사절이 되어 먼 길을 떠났다. 이피토스는 잃어버린 암말 열두 마리와 그 젖을 먹는, 힘든 일을 견디는 노새들을 찾으러 그곳에 와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말들이 그에게 죽음과 운명이 되었으니, 그가 제우스의 아들, 마음이 굳센 사내 헤라클레스, 엄청난 일들을 저지른 자를 찾아갔을 때 헤라클레스는 손님으로 온 그를 제 집에서 죽였다. 모진 자. 그는 신들의 노여운 눈길도, 손님 앞에 차려 준 식탁도 어려워하지 않고 그를 죽이고, 굽이 단단한 말들을 제 홀에 차지해 버렸다. 그 말들을 찾던 이피토스가 오디세우스를 만나, 일찍이 위대한 에우리토스가 지니다가 지붕 높은 집에서 죽으면서 아들에게 남긴 그 활을 주었다. 오디세우스는 정다운 손님 벗의 사귐을 여는 첫 선물로 이피토스에게 날카로운 칼과 튼튼한 창을 주었다. 그러나 그 전에 제우스의 아들이 오디세우스에게 활을 준 바로 그 사람, 불사의 신들과 닮은 에우리토스의 아들 이피토스를 죽였기에, 두 사람은 끝내 서로의 식탁에 마주 앉지 못했다. 고귀한 오디세우스는 검은 배를 타고 싸움터로 나갈 때 그 활을 가져가지 않고, 정다운 손님 벗을 기리는 물건으로 홀에 놓아두고 제 땅에서만 메고 다녔다.
42 여인 중에 고귀한 페넬로페는 그 방에 이르러 참나무 문지방에 올라섰다. 일찍이 목수가 솜씨 좋게 깎아 먹줄에 맞춰 곧게 다듬고 문설주를 세워 번쩍이는 문짝을 단 문지방이었다. 페넬로페는 곧 문고리에서 가죽끈을 재빨리 풀고 열쇠를 꽂아 넣은 다음, 똑바로 겨누어 문빗장들을 밀어 올렸다. 그러자 열쇠에 맞은 아름다운 문짝이 풀밭에서 풀을 뜯는 황소처럼 우렁차게 울리더니 금세 활짝 열렸다. 페넬로페는 높은 마루에 올라섰다. 거기에는 궤짝들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 향기로운 옷들이 들어 있었다. 페넬로페는 손을 뻗어 못에서 활을 내렸다. 활은 번쩍이는 활집에 싸인 채였다. 페넬로페는 그 자리에 앉아 활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소리 높여 울면서 주인의 활을 꺼냈다. 눈물 많은 울음을 실컷 울고 나서, 페넬로페는 뒤로 휜 활과 신음을 부르는 화살이 가득 든 화살통을 손에 들고 당당한 구혼자들이 있는 홀로 갔다. 시녀들은 쇠와 청동이 잔뜩 든 궤짝을 함께 들고 갔다. 주인이 시합에 쓰던 도구들이었다. 여인 중에 고귀한 페넬로페는 마침내 구혼자들 앞에 이르러, 튼튼하게 지은 지붕을 받친 기둥 곁에 서서, 반들거리는 머릿수건을 두 뺨 앞으로 드리웠다. 믿음직한 시녀가 양옆에 하나씩 서 있었다. 페넬로페는 곧 구혼자들에게 말했다.
68 "거만한 구혼자들이여, 내 말을 들어 보시오. 당신들은 주인이 오래 집을 비운 사이 이 집에 들이닥쳐 줄곧 먹고 마셔 왔소. 그러면서 나와 혼인해 나를 아내로 삼겠다는 것 말고는 다른 아무 핑계도 대지 못했소. 자, 구혼자들이여, 여기 시합이 내걸렸으니 나서 보시오. 나는 신 같은 오디세우스의 큰 활을 내놓겠소. 그 활에 가장 손쉽게 시위를 얹어 손바닥으로 당기고 열두 자루 도끼를 모두 꿰뚫는 사람을 나는 따라가겠소. 처녀로 시집와 살아온 이 집, 참으로 아름답고 살림이 가득한 이 집을 떠나서 말이오. 이 집을 나는 꿈속에서도 잊지 못할 것 같소."
80 그렇게 말하고 페넬로페는 고귀한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에게 활과 잿빛 쇠를 구혼자들 앞에 내놓으라고 일렀다. 에우마이오스는 눈물을 흘리며 받아서 내려놓았다. 소치기도 주인의 활을 보자 다른 쪽에서 울었다. 안티노오스가 두 사람을 나무라고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85 "어리석은 자들아, 하루 앞밖에 내다볼 줄 모르는 촌뜨기들아! 아, 가련한 두 놈아, 어찌하여 눈물을 쏟으며 부인의 가슴속 마음을 들쑤시느냐? 그렇지 않아도 사랑하는 남편을 잃어 마음이 고통 속에 잠겨 있는 분이다. 잠자코 앉아서 먹든지, 아니면 활은 여기 놓아두고 문밖으로 나가서 울어라. 구혼자들에게는 버거운 시합이다. 이 잘 다듬은 활에 시위를 얹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오디세우스 같은 사내는 아무도 없다. 나는 그를 직접 보았다. 그때 나는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기억은 생생하다."
96 안티노오스는 이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자기가 시위를 얹고 쇠를 꿰뚫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무랄 데 없는 오디세우스의 손에서 날아온 화살을 맨 먼저 맛볼 사람이었다. 그때 그는 홀에 앉아 오디세우스를 업신여기고 다른 동무들도 모두 부추기고 있었다.
101 신성한 힘을 지닌 텔레마코스가 그들 가운데서 말했다. "허,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께서 나를 정녕 어리석게 만드셨나 보오. 사랑하는 어머니는 슬기로우신데도 이 집을 떠나 다른 사람을 따라가겠다고 하시는데, 나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웃으며 즐거워하고 있소. 자, 구혼자들이여, 여기 시합이 내걸렸으니 나서 보시오. 이만한 여인은 지금 아카이아 땅 어디에도 없소. 신성한 필로스에도 아르고스에도 미케네에도, 이타카 이곳에도 검은 뭍에도 없소. 당신들도 그것을 잘 알 텐데, 내가 무엇 하러 어머니를 칭찬하겠소? 자, 핑계를 대며 미적거리지 말고 더는 시위 얹기를 오래 피하지 마시오. 그래야 우리가 보지 않겠소. 나도 이 활을 한번 시험해 보겠소. 내가 시위를 얹고 쇠를 꿰뚫는다면 아버지의 아름다운 시합 상을 이미 거둘 만한 사람으로 여기 남을 테니, 존귀한 어머니께서 다른 사람을 따라 이 집을 떠나 나를 슬프게 하시는 일은 없을 것이오."
118 그렇게 말하더니 텔레마코스는 벌떡 일어서서 어깨에서 붉은 외투를 벗고 날카로운 칼도 어깨에서 풀어 놓았다. 그는 먼저 도끼들을 세웠다. 모두를 위해 길게 고랑 하나를 파고 먹줄에 맞춰 곧게 늘어세운 다음 둘레의 흙을 다져 밟았는데,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도 그토록 가지런히 세우는 것을 보고 모두 놀랐다. 그는 문지방으로 가서 서서 활을 시험했는데, 시위를 얹어 쇠를 꿰뚫으려는 기대를 마음에 품고 세 번이나 당기려고 애써 활을 흔들었지만 세 번 다 힘이 빠져 놓아 버렸다. 네 번째로 힘껏 끌어당겼다면 시위를 얹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디세우스가 고개를 저어, 그가 아무리 하고 싶어 해도 말렸다. 신성한 힘을 지닌 텔레마코스가 다시 그들 가운데서 말했다.
131 "허, 나는 앞으로도 못나고 힘없는 사람이 될 모양이오. 아니면 내가 아직 너무 젊어서, 누가 먼저 덤벼들 때 사내를 막아 낼 만큼 내 손을 믿지 못하는 것이오. 자, 나보다 힘이 센 당신들이 활을 시험해 보고 시합을 끝냅시다."
136 이렇게 말하고 그는 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단단히 맞붙인 반들반들 다듬은 문짝에 활을 기대 세우고 날랜 화살도 그 자리에 아름다운 활고자에 기대어 놓은 다음, 아까 일어났던 의자로 돌아가 다시 앉았다.
140 에우페이테스의 아들 안티노오스가 그들 가운데서 말했다. "동무들, 술 따르는 이가 술을 따르기 시작하는 자리부터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차례로 모두 일어나게."
143 안티노오스가 이렇게 말하자 그 말이 모두의 마음에 들었다. 맨 먼저 오이놉스의 아들 레이오데스가 일어났다. 그는 그들의 제물 점쟁이로, 늘 아름다운 술동이 곁 맨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만은 무모한 짓을 싫어했고 구혼자들 모두에게 분개했다. 그가 맨 먼저 활과 날랜 화살을 집어 들었다. 그는 문지방으로 가서 서서 활을 시험했으나, 굳은살 하나 박이지 않은 여린 손으로 끌어당기다가 손이 먼저 지쳐 버려 시위를 얹지 못하고 구혼자들에게 말했다.
152 "벗들이여, 나는 시위를 얹지 못하겠네. 다른 사람이 잡아 보게. 이 활은 뛰어난 사내들 여럿에게서 기운과 목숨을 앗아 갈 걸세. 우리가 늘 여기 모여 날마다 기다려 온 것을 살아서 얻지 못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훨씬 낫지. 지금은 누구나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와 혼인하기를 마음속으로 바라고 꿈꾸겠지. 그러나 이 활을 시험해 보고 나면, 고운 옷을 입은 다른 아카이아 여인을 찾아 구혼 선물을 들고 구혼하게 될 테고, 그러면 페넬로페는 가장 많은 선물을 내고 운명으로 정해진 사람에게 시집가겠지."
163 그렇게 말하더니 그는 활을 내려놓았다. 단단히 맞붙인 반들반들 다듬은 문짝에 활을 기대 세우고 날랜 화살도 그 자리에 아름다운 활고자에 기대어 놓은 다음, 아까 일어났던 의자로 돌아가 다시 앉았다. 안티노오스가 그를 나무라고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레이오데스, 무슨 말이 자네 이빨 울타리를 빠져나왔나? 무섭고 고약한 말이군. 듣고 있자니 분개하게 되네. 자네가 시위를 얹지 못한다고 해서 이 활이 뛰어난 사내들에게서 기운과 목숨을 앗아 간단 말인가. 존귀한 자네 어머니가 자네를 활과 화살을 당기는 사람으로 낳지 않았을 뿐일세. 다른 당당한 구혼자들이 곧 시위를 얹을 걸세."
175 그렇게 말하더니 안티노오스는 염소치기 멜란티오스에게 일렀다. "자, 멜란티오스, 홀에 불을 지피고 그 곁에 큰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양털 가죽을 깔아라. 그리고 안에 있는 기름을 큰 덩어리로 가져오너라. 그래야 우리 젊은이들이 활을 데우고 기름을 발라 시험해 보고 시합을 끝낼 수 있다."
181 그가 이렇게 말하자 멜란티오스는 곧 꺼질 줄 모르는 불을 지피고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양털 가죽을 깐 다음, 안에 있는 기름을 큰 덩어리로 가져왔다. 젊은이들은 그것으로 활을 데워 시험해 보았지만 시위를 얹지 못했다. 힘이 한참 모자랐다.
186 안티노오스와 신을 닮은 에우리마코스는 아직 기다리고 있었다. 구혼자들의 우두머리로, 빼어남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자들이었다. 그때 신 같은 오디세우스의 소치기와 돼지치기가 둘이 함께 집 밖으로 나갔고, 고귀한 오디세우스도 몸소 그들 뒤를 따라 집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문밖으로, 안뜰 밖으로 나서자 오디세우스는 다정한 말로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193 "소치기, 그리고 돼지치기, 내가 할 말이 있는데 털어놓을까, 아니면 혼자 감춰 둘까? 내 마음은 말하라고 시키는구려. 어떤 신이 오디세우스를 데려와 그가 어디선가 이렇게 느닷없이 돌아온다면, 당신들은 그를 도울 사람이오? 구혼자들을 돕겠소, 아니면 오디세우스를 돕겠소? 가슴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말해 보시오."
199 소 떼를 돌보는 사내가 말을 받았다. "아버지 제우스여, 부디 이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그분이 돌아오시고 어떤 신이 그분을 이끌어 주시기를! 그러면 내 힘이 어떠하고 내 두 손이 어떻게 따르는지 알게 될 것이오."
203 에우마이오스도 그와 똑같이, 지혜 많은 오디세우스가 제 집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모든 신에게 빌었다.
205 오디세우스는 두 사람의 속마음을 틀림없이 알아보고 다시 그들에게 대답했다.
207 "바로 내가 안에 와 있네. 숱한 고난을 겪은 끝에 스무 해 만에 고향 땅으로 돌아왔네. 종들 가운데 자네 둘만 내가 돌아오기를 바랐다는 것을 알았네. 다른 이들 가운데서는 내가 다시 집에 돌아오게 해 달라고 비는 사람을 아무도 듣지 못했네. 자네 둘에게는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 사실대로 일러 주겠네. 신이 내 손으로 당당한 구혼자들을 쓰러뜨리게 해 준다면, 자네 둘 모두에게 아내를 얻어 주고 재산과 내 집 가까이 지은 집도 내주겠고, 그러면 자네들은 내게 텔레마코스의 동무요 형제가 될 걸세. 자, 자네들이 나를 똑똑히 알아보고 마음속으로 믿을 수 있도록 다른 뚜렷한 표지도 보여 주지. 일찍이 내가 아우톨리코스의 아들들과 파르나소스산에 갔을 때 멧돼지가 흰 엄니로 찢어 놓은 흉터일세."
221 이렇게 말하고 그는 누더기를 걷어 큰 흉터를 드러냈다. 두 사람은 그것을 보고 하나하나 똑똑히 확인하자, 슬기로운 오디세우스를 두 팔로 껴안고 울며 반가움에 그의 머리와 어깨에 입을 맞추었고, 오디세우스도 똑같이 그들의 머리와 손에 입을 맞추었다. 오디세우스가 몸소 말리며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울고 있는 사이에 해가 졌을 것이다.
228 "울음과 탄식을 그치게. 누가 홀에서 나왔다가 보고 안에 가서 일러바칠지도 모르네. 자, 다 함께 들어가지 말고 한 사람씩 들어가세. 내가 먼저 들어가고 자네들은 그 뒤에 오게. 그리고 이것을 신호로 삼세. 다른 당당한 구혼자들은 모두 내게 활과 화살통을 주지 못하게 할 걸세. 그러나 고귀한 에우마이오스, 자네는 활을 들고 집 안을 가로질러 와서 내 손에 쥐여 주게. 그리고 여인들에게 홀의 단단히 맞물린 문들을 잠그고, 누구든 우리 울타리 안에서 사내들의 신음이나 쿵쾅거리는 소리를 듣더라도 결코 문밖으로 나오지 말고 그 자리에서 잠자코 일만 하라고 이르게. 고귀한 필로이티오스, 자네에게는 안뜰 문을 열쇠로 잠그고 재빨리 끈으로 묶어 두라고 이르겠네."
242 이렇게 말하고 오디세우스는 살기 좋은 집 안으로 들어가, 아까 일어났던 의자로 가서 앉았다. 신 같은 오디세우스의 두 종도 들어왔다.
245 에우리마코스는 벌써 활을 손에 들고 불빛에 이리저리 데우고 있었다. 그래도 시위를 얹을 수 없자 그의 영광스러운 가슴은 크게 신음했다. 속을 끓이던 그가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249 "허, 나 자신 때문에도, 우리 모두 때문에도 슬프군. 괴롭기는 하지만 혼인 때문에 이토록 슬퍼하는 것은 아닐세. 바다에 둘러싸인 이타카에도 다른 도시들에도 아카이아 여인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가 신에 버금가는 오디세우스보다 힘이 이토록 모자라 그의 활에 시위도 얹지 못한다면, 뒷날 태어날 사람들까지 듣고 비웃을 수치일세."
256 에우페이테스의 아들 안티노오스가 말을 받았다. "에우리마코스,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걸세. 자네도 알지 않나. 오늘은 고장에서 그 신의 정결한 명절일세. 이런 날 누가 활을 당기겠나? 활은 가만히 내려놓으세. 도끼들은 모두 그냥 세워 둔들 어떻겠나.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디세우스의 홀에 들어와 그것들을 집어 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세. 자, 술 따르는 이가 잔마다 신께 바칠 몫을 먼저 따르게 하게. 신께 술을 따라 바치고 굽은 활은 내려놓으세. 그리고 내일 아침에 염소치기 멜란티오스에게 모든 염소 떼 가운데 가장 빼어난 염소들을 몰고 오라고 이르게. 그래서 활로 이름난 아폴론께 넓적다리뼈를 바치고 나서 활을 시험해 보고 시합을 끝내세."
269 안티노오스가 이렇게 말하자 그 말이 모두의 마음에 들었다. 전령들이 그들의 손에 물을 부어 주었고, 젊은이들이 술동이마다 술을 넘치도록 채우고, 먼저 잔마다 신께 바칠 몫을 조금씩 따른 다음 모두에게 돌렸다. 신께 술을 따라 바치고 마음껏 마시고 나자,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속임수를 품고 그들 가운데서 말했다.
275 "이름 높은 왕비의 구혼자들이여, 내 말을 들어 보시오. 가슴속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말하겠소. 특히 에우리마코스와 신을 닮은 안티노오스에게 청하오. 안티노오스가 한 이 말이 옳으니, 지금은 활을 그만두고 신들께 맡기시오. 내일 아침이면 신께서 원하는 사람에게 힘을 내려 주실 것이오. 자, 그 잘 다듬은 활을 내게 주시오. 당신들 앞에서 내 손과 힘을 시험해, 내 유연한 팔다리에 예전 같은 힘이 아직 남아 있는지, 아니면 떠돌이 생활과 돌보는 이 없는 삶이 벌써 그 힘을 앗아 가 버렸는지 알아보겠소."
285 그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 그가 잘 다듬은 활에 시위를 얹을까 두려워 방자하게 분개했다. 안티노오스가 그를 나무라고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288 "아, 가련한 나그네야, 네게는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없구나. 방자한 우리와 함께 편히 잔치를 즐기며 먹을 몫에서 빠지는 것도 없고, 우리가 하는 말과 이야기도 다 들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느냐? 다른 어떤 나그네나 거지도 우리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한다. 꿀처럼 달콤한 포도주가 너를 해치는구나. 포도주는 벌컥벌컥 들이켜고 알맞게 마시지 않는 다른 사람들도 해친다. 포도주는 이름 높은 켄타우로스 에우리티온마저 기상 높은 페이리토오스의 홀에서 미혹에 빠뜨렸으니, 에우리티온은 라피타이족에게 갔다가 포도주에 정신이 흐려지자 미쳐 날뛰며 페이리토오스의 집에서 못된 짓을 저질렀다. 영웅들은 분노에 휩싸여 벌떡 일어나 그를 문간을 지나 문밖으로 끌어내고, 무자비한 청동으로 귀와 코를 잘라 냈다. 그는 제 정신이 흐려진 탓에 그 미혹을 어리석은 마음에 짊어진 채 떠나갔다. 그 일로 켄타우로스들과 인간들 사이에 다툼이 생겨났으니, 술에 취한 그가 맨 먼저 제게 재앙을 불러들인 셈이다. 그처럼 네가 그 활에 시위를 얹는다면 너에게도 큰 재앙이 닥치리라고 일러 둔다. 우리 고장에서는 아무도 너를 돌봐 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곧바로 너를 검은 배에 실어, 모든 인간을 해치는 에케토스 왕에게 보내 버릴 것이다. 그곳에서는 결코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니 조용히 마시기나 하고, 너보다 젊은 사내들과 다투지 마라."
311 사려 깊은 페넬로페가 말을 받았다. "안티노오스, 이 집에 찾아오는 텔레마코스의 손님들을 푸대접하는 것은 좋은 일도 옳은 일도 아니오. 이 손님이 제 손과 힘을 믿고 오디세우스의 큰 활에 시위를 얹는다면 나를 제 집으로 데려가 아내로 삼으리라고 생각하오? 그 사람도 가슴속으로 그런 것은 바라지 않을 것이오. 당신들 가운데 누구도 그 일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여기서 잔치를 들지 마시오. 그건 정말 당치 않은 일이오."
320 폴리보스의 아들 에우리마코스가 대답했다. "이카리오스의 따님, 사려 깊은 페넬로페 님, 저희는 그자가 페넬로페 님을 데려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다만 사내들과 여인들의 입방아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카이아인들 가운데 저희보다 못한 누군가가 언젠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나무랄 데 없는 사내의 아내에게 훨씬 못한 사내들이 구혼하면서, 잘 다듬은 활에 시위 하나 얹지 못하는구나. 그런데 웬 떠돌이 거지가 와서 손쉽게 활에 시위를 얹고 쇠를 꿰뚫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테니 저희에게는 수치가 될 것입니다." 사려 깊은 페넬로페가 말을 받았다. "에우리마코스, 가장 뛰어난 사내의 집을 업신여기며 먹어 치우는 자들이 고장에서 좋은 명성을 얻을 수는 결코 없소. 그런데 어찌하여 그것을 수치로 여기오? 이 손님은 몸집이 아주 크고 다부지며, 훌륭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오. 자, 그에게 그 잘 다듬은 활을 주시오. 우리가 한번 봅시다. 내 분명히 말해 두는데, 이 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오. 그가 시위를 얹고 아폴론께서 그에게 영광을 내려 주신다면, 나는 그에게 외투와 윗옷, 고운 옷을 입혀 주고, 개와 사내들을 막아 낼 날카로운 창과 양날 칼을 주고, 발에 신을 신겨 주고, 그의 가슴과 마음이 바라는 곳으로 보내 주겠소."
343 의젓한 텔레마코스가 대답했다. "어머니, 이 활을 제가 원하는 사람에게 주든 말든, 바위투성이 이타카를 다스리는 이들이든 말을 먹이는 엘리스 쪽 섬들을 다스리는 이들이든, 아카이아인 가운데 저보다 권한이 큰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이 활을 아예 손님에게 주어 가져가게 하겠다 해도, 그들 가운데 누구도 제 뜻을 거슬러 억지로 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방으로 가셔서 어머니의 일, 베틀과 물렛가락을 돌보시고 시녀들에게도 일을 하라고 이르십시오. 활은 남자들이 맡겠습니다. 모든 남자가, 그러나 무엇보다 제가 맡겠습니다. 이 집의 권한은 제게 있으니까요."
354 페넬로페는 놀라서 방으로 돌아갔다. 아들의 의젓한 말을 마음에 새겼기 때문이다. 시녀들과 함께 위층 방으로 올라간 페넬로페는 사랑하는 남편 오디세우스를 그리며 울었다. 마침내 빛나는 눈의 아테나가 그 눈꺼풀 위에 달콤한 잠을 내려 주었다.
359 고귀한 돼지치기는 굽은 활을 들고 가져갔다. 그러자 구혼자들이 모두 홀에서 소리쳐 꾸짖었다. 오만한 젊은이들 가운데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362 "이 몹쓸 돼지치기, 얼빠진 놈아, 굽은 활을 어디로 가져가느냐? 아폴론과 다른 불사의 신들이 우리를 너그럽게 봐주신다면, 머지않아 네가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혼자 길러 온 그 날랜 개들이 돼지들 곁에서 너를 뜯어먹을 것이다."
366 그들이 이렇게 말하자 돼지치기는 많은 이가 홀에서 소리쳐 꾸짖으니 겁이 나서, 들고 가던 활을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텔레마코스가 맞은편에서 으르며 소리쳤다.
369 "아저씨, 활을 계속 가져가세요. 모두의 말을 들어서는 안 돼요. 제가 아저씨보다 어리긴 하지만, 돌을 던져 아저씨를 들판으로 쫓아 버릴지도 몰라요. 힘은 제가 더 세니까요. 집 안에 있는 구혼자들 모두보다도 제가 그만큼 손과 힘이 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저들 가운데 누구든 곧 비참하게 우리 집에서 내쫓아 버릴 텐데요. 저들은 못된 짓을 꾸미고 있으니까요."
376 그가 이렇게 말하자 구혼자들은 모두 그를 보고 즐겁게 웃으며 텔레마코스에 대한 사나운 노여움을 누그러뜨렸다. 돼지치기는 활을 들고 집 안을 가로질러 가서, 슬기로운 오디세우스 곁에 서서 그의 손에 쥐여 주고는, 유모 에우리클레이아를 불러내어 말했다.
381 "사려 깊은 에우리클레이아, 텔레마코스가 당신에게 홀의 단단히 맞물린 문들을 잠그고, 누구든 우리 울타리 안에서 사내들의 신음이나 쿵쾅거리는 소리를 듣더라도 결코 문밖으로 나오지 말고 그 자리에서 잠자코 일만 하라고 이르셨소."
386 그가 이렇게 말하자, 에우리클레이아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날아오르지 않았다. 유모는 살기 좋은 홀의 문들을 잠갔다.
388 필로이티오스는 소리 없이 집 밖으로 뛰어나가 담장이 튼튼한 안뜰의 문을 잠그고, 주랑 아래에 놓여 있던 양 끝이 휜 배에 쓰는 파피루스 밧줄로 문을 묶은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아까 일어났던 의자로 가서 앉아 오디세우스를 지켜보았다. 오디세우스는 벌써 활을 손에 들고, 주인이 떠나 있는 사이에 벌레가 뿔을 갉아먹지나 않았나 하고 이리저리 돌려 가며 이쪽저쪽을 살펴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옆 사람을 보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397 "이자는 활을 볼 줄 아는 데다 활 도둑이기도 한 모양이군. 아니면 제 집에도 이런 활이 놓여 있거나 이런 걸 만들 작정인가 보지. 못된 짓에 이골이 난 떠돌이 녀석이 손에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는 꼴을 보게."
401 오만한 젊은이들 가운데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자가 저 활에 시위를 얹을 수 있을 만큼만 좋은 일이 생기면 좋겠군!"
404 구혼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꾀 많은 오디세우스는 큰 활을 들어 사방을 살펴보더니,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큰 활에 시위를 얹었다. 리라와 노래에 능한 사람이 잘 꼰 양 창자 줄의 양 끝을 매어, 새 줄감개에 손쉽게 줄을 걸 때가 있다. 꼭 그처럼 오디세우스는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큰 활에 시위를 얹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시위를 잡아 튕겨 본다. 시위가 아름답게 노래하는데, 그 소리가 제비 같다. 구혼자들은 큰 슬픔에 휩싸이고 모두 얼굴빛이 변한다. 제우스가 징조를 보이며 크게 천둥을 친다. 꾀가 음흉한 크로노스의 아들이 징조를 보내 주자, 참을성 많은 고귀한 오디세우스는 기뻐한다. 그는 식탁 곁에 꺼내 놓인 날랜 화살 하나를 집는다. 다른 화살들은 우묵한 화살통 안에 들어 있는데, 아카이아인들이 곧 맛보게 될 화살들이다. 그는 화살을 줌통에 얹고 의자에 앉은 그 자리에서 시위와 오늬를 당기더니, 똑바로 겨누어 쏜다. 화살은 도끼들의 첫 자루 구멍부터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청동을 무겁게 단 화살은 곧장 모두 꿰뚫고 문밖으로 나갔다. 그러고 나서 그는 텔레마코스에게 말했다.
424 "텔레마코스, 홀에 앉아 있는 손님이 당신을 부끄럽게 하지는 않았소. 나는 과녁을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고, 활에 시위를 얹느라 오래 애쓰지도 않았소. 구혼자들이 업신여기며 깔보는 것과는 달리 내 기운은 아직 굳건하오. 이제 아카이아인들에게 날이 밝을 때 저녁을 차려 줄 때가 되었소. 그다음에는 노래와 리라로 다른 놀이도 즐겨야 하오. 그것이 잔치를 빛내는 것들이니 말이오."
431 그렇게 말하더니 그는 눈썹으로 신호를 보냈다. 신 같은 오디세우스의 사랑하는 아들 텔레마코스는 날카로운 칼을 몸에 두르고 제 손으로 창을 움켜쥔 다음, 반짝이는 청동으로 무장한 채 의자 곁, 아버지 가까이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