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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사4장 (제I권 제IV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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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제I권 제IV장) 페르시아 전쟁의 끝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까지 · 패권에서 제국으로

아테네가 그 세력을 키우게 된 사정이 마련된 경위는 이러했다. 메디아인이 그리스인에게 바다와 육지에서 패해 유럽에서 물러간 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배를 타고 미칼레로 달아난 자들이 섬멸된 뒤, 미칼레에서 그리스인을 지휘한 스파르타 왕 레오티키데스는 펠로폰네소스에서 온 동맹들과 함께 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아테네인과, 이때 페르시아 왕에게서 떨어져 나온 이오니아와 헬레스폰토스의 동맹들은 남아서 여전히 메디아인이 쥐고 있던 세스토스를 포위했다. 성 앞에서 겨울을 보낸 뒤 이방인들이 그곳을 비우자 그들은 그 도시의 주인이 되었고, 그런 다음 헬레스폰토스를 떠나 각기 자기 도시로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아테네 사람들은 이방인이 자기 나라에서 떠나자마자 맡겨 두었던 곳에서 아이들과 아내들과 남겨 두었던 재산을 곧바로 옮겨 오고 도시와 성벽을 다시 세울 준비를 했다. 성벽 둘레는 띄엄띄엄 몇 군데만 서 있었고 집도 대부분 허물어져 있었으며, 페르시아 귀족들이 숙소로 쓴 몇 채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테네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스파르타인들은 아테네로 사절을 보냈다. 그들 자신도 아테네든 다른 어느 도시든 성벽을 갖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나, 여기서 그들을 움직인 것은 주로 동맹들의 부추김이었다. 동맹들은 아테네가 새로 얻은 해군의 힘과 메디아인과의 전쟁에서 보인 용맹에 놀라 있었던 것이다. 사절들은 아테네에게 스스로 성벽을 쌓는 일을 그만두라고, 그뿐 아니라 펠로폰네소스 밖 도시들에 아직 온전히 남아 있는 성벽을 허무는 일에 함께하라고 청했다. 그 권고의 참뜻, 곧 그 안에 담긴 아테네인들에 대한 의심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내세운 이유는 이러했다. 이방인이 세 번째로 침입해 올 경우 지금 테베에서 그랬듯 작전의 근거지로 쓸 만한 견고한 자리를 어디서도 얻지 못하게 하자는 것, 그리고 물러나는 데도 치는 데도 펠로폰네소스 하나면 모두에게 넉넉한 근거지가 된다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인들이 이렇게 말하자 아테네인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권고에 따라 그들을 곧바로 돌려보냈고, 그 문제를 논의할 사절을 스파르타로 보내겠다는 답을 주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자기를 서둘러 스파르타로 보내되 동료 사절들은 뽑아 놓고도 곧바로 보내지 말고 성벽이 방어가 가능한 높이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라고 아테네인들에게 일렀다. 그동안 도시의 모든 사람이, 아테네인 자신과 그 아내와 아이들이 성벽 쌓는 일에 매달려야 하며, 사사로운 것이든 공적인 것이든 그 일에 쓸 만한 건물이라면 하나도 아끼지 말고 모두 허물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지시하고 그곳 일은 다른 무엇이든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말을 덧붙인 뒤 그는 떠났다. 스파르타에 이른 그는 당국에 면담을 청하지 않고 시간을 끌며 이런저런 핑계를 댔다. 정부 사람 누군가가 왜 민회에 나오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는 무슨 일에 걸려 아테네에 붙들린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그래도 곧 올 줄로 알며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처음에 스파르타인들은 테미스토클레스와의 친분 때문에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와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고 이미 어느 높이에 이르렀다고 입을 모아 분명히 말하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를 알아차린 그는, 소문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니 믿을 것이 아니라고, 스파르타에서 평판 있는 사람 몇을 보내 살펴보게 하고 그 보고를 믿으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그 말대로 사람들을 보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그 사람들에 관해 아테네인들에게 몰래 전갈을 보내, 드러나게 억류하지는 않으면서 될 수 있는 대로 붙들어 두고 자기들이 돌아오기 전에는 놓아주지 말라고 했다. 리시클레스의 아들 아브로니코스와 리시마코스의 아들 아리스테이데스, 곧 그의 동료들이 성벽이 충분히 올라갔다는 소식과 함께 이미 그에게 와 있었으므로, 스파르타인들이 사실을 알고 나면 자기들을 놓아주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아테네인들은 그 전갈대로 사절들을 붙들어 두었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스파르타인들 앞에 나아가 마침내 드러내어 말했다. 아테네는 이제 그 주민을 지킬 만큼 성벽을 갖추었으며, 앞으로 스파르타인이나 그 동맹이 아테네에 사절을 보내려 한다면 자기들이 찾아가는 그 사람들이 제 이익과 전체의 이익을 함께 가릴 줄 아는 이들임을 전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테네인들이 도시를 버리고 배에 오르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을 때 그들과 상의하지 않고 그 위험한 걸음을 내디뎠으며, 반대로 스파르타인들과 함께 의논한 자리에서는 어디서나 판단에 있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했다고 했다. 이제 자기들의 도시가 성벽을 갖는 것이 옳다고 여기며, 그것이 아테네 시민들에게도 그리스 동맹 전체에도 더 이로울 것이라고 했다. 군사력이 대등하지 않으면 공동의 이익을 두고 대등하거나 공정한 의견을 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동맹에 속한 모든 나라가 성벽 없이 지내든지 아니면 이번 걸음을 옳은 것으로 인정하든지 둘 중 하나라고 그는 덧붙였다.

스파르타인들은 그 말을 듣고도 아테네인들에게 노여움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절은 방해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자기 정부의 의논을 이끌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며, 게다가 그때 스파르타 시민1들의 마음은 아테네가 메디아와의 싸움에서 보인 애국심 때문에 아테네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래도 바라던 일이 어그러진 것이 속으로 언짢지 않을 수 없었다. 양쪽 나라의 사절들은 불평 없이 본국으로 떠났다.

이렇게 해서 아테네인들은 얼마 되지 않는 사이에 도시에 성벽을 둘렀다. 그 구조물에는 오늘날까지도 급하게 지은 흔적이 남아 있다. 기초는 온갖 종류의 돌로 놓였고, 어떤 자리에서는 다듬거나 맞추지도 않은 채 여러 사람의 손이 실어 온 순서 그대로 놓였으며, 무덤에서 뽑아 온 기둥과 조각된 돌도 다른 돌들과 함께 끼워 넣었다. 도시의 경계를 둘레 어느 쪽으로든 넓혔으므로 그 급한 중에 예외 없이 무엇에나 손을 댔던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또한 전에 자기가 아르콘2으로 재임한 해에 시작해 둔 피레우스의 성벽을 마무리하도록 그들을 설득했다. 천연의 항구 셋을 가진 그 자리의 뛰어남도, 아테네인들이 바다의 백성이 됨으로써 세력을 얻는 데서 크게 앞서 나가리라는 것도 그를 움직인 이유였다. 바다를 붙잡으라고 그들에게 감히 처음으로 말한 사람이 그였고, 그는 곧바로 제국의 기초를 놓기 시작했다. 피레우스를 둘러 지금도 알아볼 수 있는 그 두께의 성벽을 쌓은 것 또한 그의 권고에 따른 일이었는데, 돌은 서로 마주 오는 수레 두 대가 실어 올렸다. 그렇게 세운 두 겹 사이에는 잡석도 회반죽도 없이 네모지게 떠서 서로 맞춘 큰 돌만 있었고, 바깥쪽에서 쇠와 납으로 서로를 물려 두었다. 그가 뜻한 높이의 절반쯤이 완성되었다. 그 크기와 두께로 적의 공격을 막아 낸다는 생각이었고, 그는 몸이 온전하지 못한 자들로 이루어진 적은 수비대만으로도 그 성벽을 넉넉히 지킬 수 있고 나머지는 함대에 쓸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그의 마음을 가장 많이 차지한 것이 함대였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왕의 군대에게 바닷길이 육로보다 쉽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또 그는 위쪽 도시보다 피레우스가 더 값지다고 여겼으며, 실제로 육지에서 몰릴 날이 오면 피레우스로 내려가 함대로 온 세상에 맞서라고 아테네인들에게 늘 권했다. 그러므로 아테네인들은 그렇게 성벽을 완성했고, 메디아인이 물러간 직후에 다른 건물들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클레옴브로토스의 아들 파우사니아스가 그리스인의 총사령관으로 펠로폰네소스의 함선 20척과 함께 스파르타에서 파견되었다. 아테네인들도 함선 30척으로 그와 함께 나아갔고 다른 동맹도 여럿 따랐다. 그들은 키프로스로 원정해 섬의 대부분을 굴복시켰고, 이어 메디아인의 손에 있던 비잔티움을 쳐서 항복시켰다. 이 일은 스파르타 시민들이 아직 패권을 쥐고 있을 때 일어났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의 난폭함은 이미 그리스인들에게, 특히 이오니아인들과 이제 막 해방된 주민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들은 아테네인들에게 찾아가 같은 핏줄로서 자기들의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파우사니아스 쪽에서 나오는 어떤 난폭한 처사도 막아 달라고 청했다. 아테네인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런 일은 무엇이든 억누르며 그 밖의 모든 것도 자기들의 이익에 맞다고 보이는 대로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는 사이 스파르타인들은 자기들에게 들어온 보고를 조사하려고 파우사니아스를 불러들였다. 스파르타에 오는 그리스인들이 그를 두고 여러 가지 무거운 혐의를 들고 왔으며, 겉으로 보기에도 그에게는 장군의 태도보다 참주를 본뜬 티가 더 짙었다. 마침 그의 소환은, 그가 불러일으킨 미움 때문에 동맹들이 펠로폰네소스에서 온 병사들만 빼고 그를 버리고 아테네인 편에 서게 된 바로 그때에 이르렀다. 스파르타에 이른 그는 사사로이 저지른 횡포로 책망을 받았으나 가장 무거운 죄목에서는 벗어나 무죄를 선고받았다. 알아 둘 것이 있는데, 메디아 쪽에 붙었다는 혐의가 그에게 걸린 주된 죄목 가운데 하나였고 겉으로 보기에 근거도 가장 튼튼한 것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은 그를 지휘 자리에 되돌리지 않고 도르키스와 다른 몇 사람을 적은 병력과 함께 내보냈는데, 이들은 동맹이 더는 자기들에게 패권을 내줄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알아차린 그들은 떠났고, 스파르타인들은 그 뒤를 이을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나가는 자들이 파우사니아스에게서 보인 것과 같은 타락에 빠지지 않을까 두려웠고, 게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손을 떼고 싶었으며, 아테네인들이 그 자리를 맡을 만하고 그때로서는 자기들에게 우호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파우사니아스에 대한 미움 때문에 동맹들이 스스로 넘긴 패권을 그렇게 이어받은 아테네인들은 어느 도시가 이방인을 상대하는 데 돈을 내고 어느 도시가 배를 낼지 정했으며, 왕의 땅을 짓밟아 자기들이 당한 것을 되돌려주겠다는 것이 내세운 목적이었다. 아테네인들이 '그리스 재무관'이라는 직책을 처음 세운 것이 이때였다. 이 관리들이 공납을 받았는데, 내는 돈을 그렇게 불렀다. 공납은 처음에 460탈란톤3으로 정해졌다. 공동의 금고는 델로스에 두었고 회의는 신전에서 열렸다. 그들의 패권은 공동 회의의 결의에 따라 움직이는 독립된 동맹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패권은 페르시아 전쟁과 지금의 전쟁 사이의 기간에 이방인을 상대로, 자기들에게서 떨어져 나간 동맹을 상대로, 그리고 여러 계기에 부딪치게 된 펠로폰네소스 세력을 상대로 벌인 다음과 같은 전쟁과 통치의 일들로 그 성격이 드러났다. 내가 이 일들을 적고 이렇게 본줄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무릅쓰는 까닭은, 이 대목의 역사를 앞선 사람들이 모두 빼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페르시아 전쟁 이전의 그리스 역사나 페르시아 전쟁 자체에만 머물렀다. 헬라니코스가 자기 아테네 역사에서 이 일들을 다룬 것은 사실이나, 그는 다소 간략하고 연대가 정확하지 않다. 게다가 이 일들의 역사 안에는 아테네 제국이 어떻게 커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먼저 아테네인들은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의 지휘 아래 스트리몬 강의 에이온을 메디아인에게서 포위해 빼앗고 그 주민을 노예로 삼았다. 다음으로 그들은 돌로피아 주민이 사는 에게해의 섬 스키로스를 쳐서 주민을 노예로 삼고 자기들이 식민지로 삼았다. 이어 카리스토스를 상대로 전쟁이 벌어졌는데, 에우보이아의 나머지는 중립을 지켰고 전쟁은 조건을 붙인 항복으로 끝났다. 그 뒤 낙소스가 동맹에서 빠져나가 전쟁이 일어났고, 낙소스는 포위를 겪은 뒤 돌아와야 했다. 동맹 도시를 굴복시켜 약정을 깨뜨린 첫 사례가 이것이었으며, 나머지 도시들도 사정이 정하는 순서에 따라 그 전례를 뒤따랐다. 떨어져 나간 온갖 이유 가운데 공납과 함선의 체납, 그리고 복무 불이행에 얽힌 것이 으뜸이었다. 아테네인들이 매우 엄하고 가차 없이 요구했으며, 꾸준한 노역에 익숙하지도 않고 실은 그럴 뜻도 없는 사람들에게 강제의 고삐를 조여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 다른 몇 가지 점에서도 아테네인들은 처음에 그랬던 그 인기 있는 통치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이 제 몫보다 많은 복무를 지고 있었으므로 동맹에서 벗어나려는 자를 굴복시키는 일도 그만큼 쉬웠다. 이는 동맹들 자신의 탓이었다. 복무를 면하고 싶은 마음에 대부분이 자기 몫의 비용을 배 대신 돈으로 내기로 해서 집을 떠나야 하는 일을 피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테네는 그들이 낸 자금으로 해군을 키웠고, 반란을 일으키면 그들에게는 전쟁을 치를 물자도 경험도 없었다.

다음은 에우리메돈 강에서 아테네인과 그 동맹이 메디아인을 상대로 벌인 육지와 바다의 싸움이다. 이때 아테네인들은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의 지휘 아래 같은 날 두 싸움을 다 이겼고, 함선 200척으로 이루어진 페니키아 함대를 모두 붙잡아 부수었다. 얼마 뒤 타소스인이 떨어져 나갔는데, 트라키아 건너편 해안의 시장과 자기들이 가진 광산을 둘러싼 다툼이 그 원인이었다. 아테네인들은 함대를 이끌고 타소스로 가서 그들을 바다에서 이기고 섬에 상륙했다. 같은 무렵 그들은 자기 시민과 동맹에서 정착민 1만 명을 보내, 그때는 엔네아 호도이 곧 '아홉 길'이라 불리고 지금은 암피폴리스라 불리는 곳에 자리를 잡게 했다. 그들은 에도니인에게서 엔네아 호도이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으나, 트라키아 내륙으로 나아가다가 에도니인의 도시 드라베스코스에서 트라키아인의 집결한 병력에게 전멸했다. 트라키아인들은 엔네아 호도이에 정착하는 것을 적대 행위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들에서 패하고 포위를 겪던 타소스인은 스파르타에 호소해 아티카를 침입하여 자기들을 도와 달라고 청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알리지 않고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고 또 그럴 뜻이었으나, 지진이 일어나고 그와 함께 헬롯4과 페리오이코이5 가운데 투리아인과 아이타이아인이 이토메로 떨어져 나가는 일이 벌어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헬롯은 대부분 그 유명한 전쟁에서 노예가 된 옛 메세니아인의 후손이었고, 그래서 그들 전부가 메세니아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렇게 스파르타인들이 이토메의 반란자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사이, 타소스인은 포위 3년째에 성벽을 허물고 배를 내놓고 요구된 돈을 당장 치르고 앞으로 공납을 내며 대륙의 소유지를 광산과 함께 포기하기로 하여 아테네인들에게서 조건을 얻어 냈다.

한편 스파르타인들은 이토메의 반란자들을 상대로 한 전쟁이 오래 갈 듯하자 동맹들의 도움을 청했고 특히 아테네인들을 불렀는데, 아테네인들은 키몬의 지휘 아래 얼마간의 병력을 이끌고 왔다. 이렇게 다급히 부른 이유는 그들이 공성에 능하다는 평판에 있었다. 오래 끈 포위가 스파르타인들에게 자기들이 그 기술에 서투르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들이쳐서 그곳을 빼앗았을 것이다. 스파르타인과 아테네인 사이의 첫 공개된 불화가 이 원정에서 나왔다. 들이쳐도 그곳을 빼앗지 못하자 스파르타인들은 아테네인들의 진취적이고 변혁을 좋아하는 성격을 꺼렸고, 게다가 그들을 다른 핏줄로 여겼으므로, 그들이 남아 있으면 이토메에서 포위된 자들의 꾐에 넘어가 정치적 변혁을 시도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의심을 입에 올리지 않고 이제 그들이 필요하지 않다고만 말하며 동맹 가운데 아테네인만 돌려보냈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자기들을 돌려보낸 것이 두 이유 가운데 더 떳떳한 쪽에서 나온 일이 아니라 품게 된 의심에서 나온 일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스파르타인에게서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을 안은 채 깊이 상해서 떠났다. 그리고 본국에 돌아온 순간 메디아인에 맞서 맺었던 동맹을 끊고 스파르타의 적인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었으며, 약정을 맺은 양쪽은 각기 테살리아인과도 같은 맹세를 하고 같은 동맹을 맺었다.

그러는 동안 이토메의 반란자들은 10년에 걸친 저항을 더 끌 수 없어 스파르타에 항복했다. 조건은 신변을 보장받아 펠로폰네소스를 떠나고 다시는 그 땅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었으며, 뒤에 그곳에서 발견되는 자는 누구든 잡은 사람의 노예가 되기로 했다. 알아 둘 것이 있는데, 스파르타인들에게는 이토메의 제우스 탄원자를 놓아주라는 델포이의 오랜 신탁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들과 아내들과 함께 떠났고, 이제 스파르타인들에게 품은 미움 때문에 그들을 받아들인 아테네가 얼마 전 오졸리스의 로크리스인에게서 빼앗은 나우팍토스에 자리를 얻었다. 아테네인들의 동맹에는 메가라인이 또 하나로 더해졌는데, 메가라인은 코린트가 강요한 경계 문제의 전쟁에 시달려 스파르타 동맹을 버리고 넘어왔다. 아테네인들은 메가라와 페가이를 차지하고 메가라인에게 도시에서 니사이아까지 이르는 긴 성벽을 쌓아 주었으며 그곳에 아테네 수비대를 두었다. 코린트인이 아테네에 그토록 사무친 미움을 품게 된 주된 원인이 이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프삼메티코스의 아들이며 이집트 변경에 사는 리비아인의 리비아 왕인 이나로스가, 파로스 위쪽 도시 마레아에 본거를 두고 이집트 거의 전부를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에게서 떨어지게 일으켰고, 스스로 그 우두머리가 되어 아테네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테네인들은 마침 자기들과 동맹의 배 200척으로 벌이고 있던 키프로스 원정을 버려두고 이집트에 이르러 바다에서 나일강으로 올라갔고, 그 강과 멤피스의 3분의 2를 손에 넣은 뒤 '흰 성채'라 불리는 남은 3분의 1을 치는 데 나섰다. 그 안에는 거기로 피해 들어온 페르시아인과 메디아인, 그리고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이집트인이 있었다.

그러는 동안 아테네인들은 함대에서 할리아이에 상륙했다가 코린트인과 에피다우로스인의 병력과 맞붙었고, 코린트인이 이겼다. 그 뒤 아테네인들은 케크리팔리아 앞에서 펠로폰네소스 함대와 맞붙어 아테네인이 이겼다. 이어 아이기나와 아테네 사이에 전쟁이 터졌고, 양쪽이 각기 동맹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인과 아이기나인 사이에 아이기나 앞바다에서 큰 해전이 벌어졌다. 승리는 아테네인에게 돌아갔고, 그들은 적의 배 70척을 빼앗고 그 땅에 상륙해 스트로이보스의 아들 레오크라테스의 지휘 아래 포위를 시작했다. 이에 펠로폰네소스인들은 아이기나인을 돕고자 전에 코린트인과 에피다우로스인 밑에서 복무했던 중장보병 300명을 아이기나에 들여보냈다. 그러는 동안 코린트인과 그 동맹은 게라네이아 고지를 차지하고 메가라 땅으로 내려갔는데, 큰 병력이 아이기나와 이집트에 나가 있으니 아테네가 아이기나의 포위를 풀지 않고는 메가라인을 도울 수 없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아이기나의 군대를 움직이는 대신 도시에 남아 있던 노인과 젊은이로 병력을 일으켜 미로니데스의 지휘 아래 메가라 땅으로 행군했다. 코린트인과의 싸움이 무승부로 끝난 뒤 두 군대는 각기 자기들이 이겼다고 여기며 헤어졌다. 그래도 굳이 따지면 아테네인들이 오히려 유리했고, 코린트인들이 떠나자 전승 기념물을 세웠다. 코린트인들은 자기 도시의 노인들에게 비웃음을 듣고 떠밀려 준비를 갖추었고, 12일쯤 뒤에 와서 승자로서 자기들의 기념물을 세웠다. 아테네인들은 메가라에서 쳐 나가 기념물을 세우는 일에 매달린 무리를 끊어 놓고 나머지와 싸워 이겼다. 패한 군대가 물러나는 중에 상당한 규모의 한 부대가 추격에 몰리고 길을 잘못 들어, 사방에 깊은 참호가 둘려 있고 빠져나갈 길이 없는 어느 사유지의 밭으로 뛰어들었다. 그곳을 알고 있던 아테네인들은 중장보병으로 그 앞을 막고 경보병을 둘레에 둥그렇게 세워 안에 들어간 자들을 모두 돌로 쳐 죽였다. 코린트는 여기서 심한 타격을 입었다. 그 군대의 대부분은 본국으로 물러나기를 이어 갔다.

이 무렵 아테네인들은 바다로 내려가는 장성, 곧 팔레론 쪽 성벽과 피레우스 쪽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포키스인들은 보이온과 키티니온과 에리네온이라는 도시를 품은, 스파르타인의 옛 고향인 도리스로 원정했다. 그들이 그 도시들 가운데 하나를 빼앗았을 때, 아직 미성년인 파우사니아스의 아들 플레이스토아낙스 왕을 대신해 지휘하던 클레옴브로토스의 아들 니코메데스 아래의 스파르타인들이 자기들의 중장보병 1,500명과 동맹의 1만 명을 이끌고 도리스인을 도우러 왔다. 포키스인에게 조건을 붙여 그 도시를 돌려주게 한 뒤 그들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크리사 만을 건너는 바닷길은 아테네 함대에게 막힐 위험이 있었고, 게라네이아를 넘는 길은 아테네인들이 메가라와 페가이를 쥐고 있었으므로 도무지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 그 길목은 험한 곳이었고 늘 아테네인들이 지켰으며, 이번에는 아테네인들이 자기들의 통행을 막을 뜻이라는 정보가 스파르타인들에게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보이오티아에 머물면서 어느 행군로가 가장 안전할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렇게 마음먹은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아테네에서 민주정의 통치와 장성 공사를 끝장내고 싶어 하던 한 무리가 그들에게 몰래 부추김을 보내 온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아테네인들은 자기들의 전군과 아르고스인 1,000명, 그리고 나머지 동맹이 각기 낸 병력을 이끌고 그들을 치러 행군했다. 모두 1만 4,000명이었다. 스파르타인들이 통행할 길을 찾지 못해 막막해한다는 생각이, 그리고 민주정을 뒤엎으려는 시도가 있다는 의심이 이 행군을 재촉했다. 테살리아 동맹에서 온 기병도 아테네인들에게 합류했으나, 이들은 싸움 도중에 스파르타인 쪽으로 넘어갔다.

싸움은 보이오티아의 타나그라에서 벌어졌다. 양쪽이 크게 잃은 뒤 승리는 스파르타인과 그 동맹에게 돌아갔다. 스파르타인들은 메가라 땅에 들어가 과실수를 베어 넘긴 뒤 게라네이아와 지협을 건너 본국으로 돌아갔다. 싸움이 있은 지 62일 뒤에 아테네인들은 미로니데스의 지휘 아래 보이오티아로 행군해 오이노피타에서 보이오티아인을 싸움으로 이기고 보이오티아와 포키스의 주인이 되었다. 그들은 타나그라인의 성벽을 헐고, 오푼토스의 로크리스인 가운데 가장 부유한 100명을 인질로 잡고, 자기들의 장성을 끝냈다. 이어 아이기나인이 조건을 붙여 아테네에 항복했으니, 그들은 성벽을 허물고 배를 내놓았으며 앞으로 공납을 내기로 했다. 아테네인들은 톨마이오스의 아들 톨미데스 아래 펠로폰네소스를 돌아 항해하며 스파르타의 조선소를 불태우고 코린트인의 도시 칼키스를 빼앗았으며, 시키온에 상륙해 시키온인을 싸움에서 이겼다.

그러는 동안 이집트에 있던 아테네인과 그 동맹은 아직 그곳에 머물며 전쟁의 온갖 곡절을 겪었다. 처음에는 아테네인들이 이집트의 주인이었고, 왕은 페르시아인 메가바조스를 돈과 함께 스파르타로 보내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아티카를 침입하도록 매수해 아테네인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려 했다. 그 일이 진척되지 않고 돈만 헛되이 쓰이는 것을 알고 왕은 남은 돈과 함께 메가바조스를 불러들이고, 페르시아인 조피로스의 아들 메가비조스를 큰 군대와 함께 이집트로 보냈다. 육로로 이른 그는 싸움에서 이집트인과 그 동맹을 이기고 그리스인들을 멤피스에서 몰아냈으며, 마침내 프로소피티스섬에 몰아넣고 1년 6개월 동안 포위했다. 끝내 그는 운하의 물을 다른 물길로 돌려 빼내어 그들의 배를 마른땅에 얹어 놓고 섬의 대부분을 육지에 잇더니, 걸어서 건너가 그곳을 함락했다. 그렇게 그리스인의 사업은 6년에 걸친 전쟁 끝에 무너졌다. 그 큰 무리 가운데 몇 사람이 리비아를 지나 무사히 키레네에 이르렀으나 대부분은 죽었다. 그리하여 이집트는 다시 왕의 지배 아래로 돌아갔는데, 늪지대의 왕 아미르타이오스만은 늪이 넓어 붙잡을 수 없었으므로 예외였다. 늪지대 사람들은 이집트인 가운데 가장 싸움에 능한 자들이기도 했다. 이집트 반란을 홀로 일으킨 리비아 왕 이나로스는 배신을 당해 붙잡혀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러는 동안 배 50척으로 이루어진 구원 함대가 아테네와 나머지 동맹에서 이집트로 떠나 있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른 채 나일강의 멘데스 하구에 배를 댔다. 육지 쪽에서는 군대에게, 바다 쪽에서는 페니키아 해군에게 공격을 받아 배는 대부분 부수어졌고, 남은 몇 척만 물러나 살아났다. 아테네인과 그 동맹이 이집트로 벌인 그 큰 원정의 끝은 그러했다.

그러는 동안 테살리아 왕 에케크라티다스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테살리아에서 쫓겨나 망명한 처지로 아테네인들에게 자기를 복귀시켜 달라고 설득했다. 아테네인들은 동맹인 보이오티아인과 포키스인을 데리고 테살리아의 파르살로스로 행군했다. 그들은 그 땅의 주인이 되었으나 진영 바로 근처에서만 그러했고, 그 밖으로는 테살리아 기병이 두려워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시를 빼앗지도 원정의 다른 목적을 이루지도 못한 채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오레스테스와 함께 돌아갔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아테네인 1,000명이 페가이에 있던 배에 올라(페가이는 이제 그들의 것이었음을 기억해 둘 것이다) 크산티포스의 아들 페리클레스의 지휘 아래 해안을 따라 시키온으로 항해했다. 시키온에 상륙해 맞서 나온 시키온인을 이긴 그들은 곧바로 아카이아인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아카르나니아의 오이니아다이로 행군해 그곳을 포위했다. 그러나 빼앗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3년 뒤 펠로폰네소스인과 아테네인 사이에 5년 기한의 휴전이 맺어졌다. 그리스 안의 전쟁에서 풀려난 아테네인들은 키몬의 지휘 아래 자기들과 동맹의 배 200척으로 키프로스로 원정했다. 그 가운데 60척은 늪지대의 왕 아미르타이오스의 청에 따라 이집트로 떼어 보냈고, 나머지는 키티온을 포위했으나 키몬이 죽고 식량이 모자라 물러나야 했다. 키프로스의 살라미스 앞바다로 나아간 그들은 페니키아인과 키프로스인과 킬리키아인을 상대로 육지와 바다에서 싸워 양쪽 모두에서 이긴 뒤 본국으로 떠났고, 이집트에서 돌아온 함대도 그들과 함께 돌아갔다. 그 뒤 스파르타인들은 신성한 전쟁에 나아가 델포이의 신전을 차지하고 그것을 델포이인의 손에 넘겼다. 그들이 물러난 직후에 아테네인들이 나아가 그 신전을 차지하고 포키스인의 손에 넘겼다.

그 뒤 얼마 지나, 오르코메노스와 카이로네이아와 보이오티아의 다른 몇 곳이 보이오티아 추방자들의 손에 있었으므로, 아테네인들은 톨마이오스의 아들 톨미데스의 지휘 아래 아테네 중장보병 1,000명과 동맹이 낸 병력을 이끌고 앞에 말한 그 적대적인 곳들을 치러 행군했다. 그들은 카이로네이아를 빼앗아 주민을 노예로 삼고 수비대를 남긴 뒤 돌아오기 시작했다. 길에서 그들은 코로네이아에서 오르코메노스에서 온 보이오티아 추방자들과 로크리스인 얼마와 에우보이아 추방자들, 그리고 같은 뜻을 가진 다른 자들에게 공격을 받아 싸움에서 패했고,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사로잡혔다. 아테네인들은 그 사람들을 되찾는다는 조약을 맺고 보이오티아 전역에서 물러났으며, 추방되어 있던 보이오티아인들이 돌아오고 나머지 모두와 함께 독립을 되찾았다.

그 뒤 오래지 않아 에우보이아가 아테네에서 떨어져 나갔다. 페리클레스가 아테네인의 군대를 이끌고 이미 그 섬으로 건너간 때에, 메가라가 반란을 일으켰고 펠로폰네소스인들이 곧 아티카를 침입하려 하며 아테네 수비대가 니사이아로 피한 몇 사람만 빼고 메가라인에게 끊겨 죽었다는 소식이 그에게 전해졌다. 메가라인들은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코린트인과 시키온인과 에피다우로스인을 도시에 들여놓았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페리클레스는 서둘러 에우보이아에서 군대를 되돌렸다. 그 뒤 펠로폰네소스인들은 파우사니아스의 아들 플레이스토아낙스 왕의 지휘 아래 엘레우시스와 트리오스까지 아티카로 행군해 그 땅을 짓밟고, 더 나아가지 않은 채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아테네인들은 페리클레스의 지휘 아래 다시 에우보이아로 건너가 섬 전체를 굴복시켰다. 히스티아이아만 빼고 모두 협정으로 정리했고, 히스티아이아인은 집에서 내쫓고 그 땅을 자기들이 차지했다.

에우보이아에서 돌아온 지 오래지 않아 그들은 스파르타인과 그 동맹과 30년 기한의 휴전을 맺고, 펠로폰네소스에서 자기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인 니사이아와 페가이와 트로이젠과 아카이아를 내놓았다. 휴전 6년째에 사모스인과 밀레토스인 사이에 프리에네를 두고 전쟁이 터졌다. 전쟁에서 밀린 밀레토스인들은 사모스인을 두고 큰 소리로 불평하며 아테네로 왔다. 정부를 뒤엎고 싶어 하던 사모스 자체의 사사로운 사람들 몇도 여기에 함께했다. 그래서 아테네인들은 배 40척으로 사모스로 항해해 민주정을 세우고, 사모스인에게서 소년 50명과 같은 수의 성인을 인질로 잡아 렘노스에 두었으며, 섬에 수비대를 남긴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모스인 가운데 더러는 섬에 남지 않고 대륙으로 달아났다. 이들은 도시에 있는 가장 힘 있는 자들과 약정을 맺고 당시 사르디스의 태수였던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피수트네스와 동맹을 맺어 용병 700명을 모았고, 밤을 타 사모스로 건너갔다. 그들의 첫 걸음은 민중에게 들고일어나 그 대부분을 손에 넣은 것이었고, 다음은 렘노스에서 자기들의 인질을 빼내 온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반란을 일으켜 자기들에게 남겨져 있던 아테네 수비대와 그 지휘관들을 피수트네스에게 넘기고, 곧바로 밀레토스를 치는 원정을 준비했다. 비잔티움인도 그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아테네인들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배 60척으로 사모스를 치러 항해했다. 그 가운데 16척은 페니키아 함대를 살피러 카리아로, 또 지원군을 부르는 명령을 돌리러 키오스와 레스보스로 갔으므로 싸움에는 들지 않았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가 동료 아홉 사람과 함께 지휘한 배 44척은 트라기아섬 앞에서 밀레토스에서 항해해 오던 사모스 배 70척과 싸움을 벌였는데, 그 가운데 20척은 수송선이었다. 승리는 아테네인에게 돌아갔다. 그 뒤 아테네에서 온 배 40척과 키오스와 레스보스의 배 25척으로 보강을 받은 아테네인들은 상륙해, 육지에서 우세를 쥐고 성벽 셋으로 도시를 둘러쌌으며 바다에서도 그 도시를 둘러쌌다. 그러는 동안 페리클레스는 페니키아 함대가 사모스인을 도우러 다가온다는 정보가 들어왔으므로 봉쇄 함대에서 배 60척을 떼어 서둘러 카우노스와 카리아로 떠났다. 실제로 스테사고라스와 다른 사람들이 그 함대를 데려오려고 배 5척으로 섬을 떠나 있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사모스인들이 갑자기 쳐 나와 방비가 되어 있지 않은 진영을 들이쳤다. 그들은 감시선들을 부수고 자기들을 맞으러 물에 띄우던 배들과 싸워 이겨, 14일 동안 자기들의 바다를 쥐고 마음대로 실어 들이고 실어 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가 돌아오자 그들은 다시 갇혔다. 그 뒤 새 지원군이 이르렀다. 투키디데스와 하그논과 포르미온과 함께 아테네에서 온 배 40척, 틀레폴레모스와 안티클레스와 함께 온 20척, 그리고 키오스와 레스보스에서 온 배 30척이었다. 잠시 싸워 보려 한 뒤 사모스인들은 더 버틸 수 없어 9개월에 걸친 포위 끝에 굴복하고 조건을 붙여 항복했다. 그들은 성벽을 허물고 인질을 내주고 배를 내놓았으며 전쟁 비용을 나누어 갚기로 했다. 비잔티움인도 전과 같이 복속하기로 했다.

주

  1. 1. 스파르타 시민 — 스파르타 사회는 완전시민권을 가진 스파르타 시민, 주변 자유민, 헬롯으로 나뉘었다. 원문에서 저자는 이 좁은 뜻의 '스파르타 시민'과 국가 전체를 가리키는 '스파르타(라케다이몬)'를 구분해 쓴다.

  2. 2. 아르콘 — 아테네의 정무관직. 해마다 뽑았고 그 가운데 수석 아르콘의 이름으로 그해를 불렀다.

  3. 3. 탈란톤 — 그리스의 무게 단위이자 화폐 단위. 1탈란톤은 6,000드라크메에 해당했다. 현대 화폐로 환산하지 않는다.

  4. 4. 헬롯 — 스파르타에 예속되어 땅을 갈던 신분. 개인이 아니라 국가에 딸린 예속민으로, 수가 많아 스파르타인은 늘 그들의 봉기를 경계했다.

  5. 5. 페리오이코이 — 스파르타 주변의 자유민. 스파르타에 딸린 도시에 살며 군역을 졌으나 완전시민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