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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사7장 (제II권 제VII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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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제II권 제VII장) 전쟁 제2년 · 아테네 역병 · 페리클레스의 처지와 정책 · 포티다이아의 함락

그해 겨울에 치러진 장례는 그러했고, 그와 함께 전쟁의 첫해가 끝났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스파르타인과 그 동맹들은 전과 같이 병력의 3분의 2를 이끌고 제욱시다모스의 아들이며 스파르타의 왕인 아르키다모스의 지휘 아래 아티카를 침공했고, 진을 치고 그 땅을 짓밟았다. 그들이 아티카에 들어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아테네인들 사이에서 역병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렘노스 일대와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이 병이 터진 일이 있었다는 말이 있었으나, 이만한 범위와 이만한 사망률의 역병은 어디에서도 기억되는 바가 없었다. 의사들도 처음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는데 이 병을 다루는 올바른 방도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며, 오히려 병자를 가장 자주 찾아다닌 만큼 그들 자신이 가장 빽빽하게 죽어 갔고, 사람의 어떤 기술도 더 나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신전에서 올리는 탄원과 점술과 그 밖의 것들도 똑같이 헛된 것으로 드러났고, 마침내 재앙의 압도적인 성격이 그런 일들을 아예 그만두게 만들었다.

이 병은 이집트 위쪽 에티오피아 지방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거기에서 이집트와 리비아로, 그리고 페르시아 대왕의 영토 대부분으로 내려왔다. 그러다 갑자기 아테네에 들이쳐 먼저 피레우스의 주민을 덮쳤는데, 그곳에는 아직 우물이 없었으므로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저수지에 독을 풀었다는 말이 이때 나왔다. 그 뒤로는 위쪽 도시에도 나타났고, 그때부터 죽는 사람이 훨씬 잦아졌다. 이 병의 기원과 원인에 관한 온갖 추측은, 이만큼 큰 격변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원인이라는 것을 찾을 수 있다면, 문외한이든 전문가든 다른 저술가들에게 맡긴다. 나로서는 이 병의 성질을 그저 적어 두고, 혹시라도 다시 터지는 일이 있을 때 살피는 사람이 그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증상을 밝혀 두려 한다. 나는 그 병을 직접 앓았고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보았으므로, 이 일을 그만큼 더 잘할 수 있다.

그해는 이 병을 빼면 전례 없이 질병이 없던 해로 인정되고 있으며, 그나마 생긴 몇 안 되는 병례도 모두 이 병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겉으로 드러나는 원인은 없었고,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머리에 심한 열이 오르고 눈이 붉어지며 부어오르는 증세에 붙잡혔으며, 목구멍이나 혀 같은 안쪽 부위가 피에 젖어 부자연스럽고 역한 숨을 내뿜었다. 이 증상들에 뒤이어 재채기가 나고 목이 쉬었으며, 그런 다음 곧 통증이 가슴에 이르러 거친 기침을 일으켰다. 병이 위에 자리를 잡으면 위를 뒤집어 놓아, 의사들이 이름 붙여 놓은 온갖 종류의 담즙이 쏟아져 나왔고 거기에 아주 심한 괴로움이 따랐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또 헛구역질이 이어져 심한 경련을 일으켰는데,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곧 그쳤고 어떤 경우에는 훨씬 뒤에야 그쳤다. 몸은 겉으로 만져 보면 그리 뜨겁지 않았고 빛깔이 창백하지도 않았으나, 붉은 기가 돌고 검푸르게 변했으며 작은 고름집과 헌데가 돋아났다. 그러나 속은 하도 타올라 병자는 아주 얇은 옷이나 아마천조차 몸에 걸치는 것을 견디지 못했고, 실은 알몸이 아닌 어떤 상태도 견디지 못했다. 그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한 것은 찬물에 몸을 던지는 일이었고, 실제로 돌보는 이 없이 버려진 병자 가운데 더러는 가시지 않는 갈증의 괴로움 속에 빗물 저수통에 뛰어들었는데, 물을 적게 마시든 많이 마시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뿐 아니라 쉴 수도 잠들 수도 없는 참담한 느낌이 끊임없이 그들을 괴롭혔다. 그러는 동안 몸은 병이 한창인 동안에는 여위지 않고 그 파괴에 놀랍도록 잘 버텼으므로, 대부분의 경우처럼 이레나 여드레째에 몸속의 염증에 굴복할 때에도 그들에게는 아직 얼마간 힘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고비를 넘기고 병이 더 아래로 내려가 창자에 이르러 거기에 심한 궤양을 일으키고 그와 함께 극심한 설사가 따르면, 이것이 대개 목숨을 앗아 가는 쇠약을 불러왔다. 이 병은 처음에 머리에 자리를 잡고 거기에서 온몸으로 퍼져 나갔으며, 목숨을 앗아 가지 않은 경우에도 몸의 끝부분에 흔적을 남겼는데, 음부와 손가락과 발가락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것들을 잃고서 목숨을 건졌고 더러는 눈까지 잃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병에서 막 회복되었을 때 기억을 완전히 잃어, 자기 자신도 벗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이 병의 성질은 어떤 서술로도 담아낼 수 없는 것이었고 그 공격은 사람의 본성으로 견디기에 너무 혹독한 것이었으나, 그것이 보통의 모든 질병과 다르다는 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다음의 사정에서였다. 사람의 주검을 먹이로 삼는 새와 짐승은 모두 그것에 손을 대지 않거나(묻히지 못한 주검이 많았는데도 그랬다) 맛을 본 뒤에 죽었다. 이것의 증거로, 그런 새들이 실제로 사라진 것이 눈에 띄었으니 주검 주변에 없었고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물론 내가 말한 이런 일들은 개처럼 사람이 기르는 짐승에서 가장 잘 살필 수 있었다.

여러 가지이고 저마다 특이했던 개별 병례의 차이들을 지나친다면, 이 병의 일반적인 특징은 그러했다. 그러는 동안 도시는 보통의 모든 질병에서 벗어나 있었고, 어떤 병례가 생기더라도 그것은 이 병으로 끝났다. 돌봄 없이 죽은 사람이 있었고, 온갖 보살핌을 받으며 죽은 사람도 있었다. 특효약으로 쓸 만한 치료법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한 경우에 좋았던 것이 다른 경우에는 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튼튼한 체질과 약한 체질이 똑같이 버티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고, 더할 수 없이 조심스럽게 음식을 가려 먹였는데도 모두가 한결같이 쓸려 갔다. 이 병에서 단연 가장 무서운 특징은 누구든 자기가 병에 걸렸다고 느낄 때 뒤따르는 낙담이었으니, 곧바로 빠져드는 절망이 버티는 힘을 앗아 가 그들을 병에게 훨씬 쉬운 먹이로 남겨 두었기 때문이며, 그뿐 아니라 서로를 돌보다가 병이 옮아 사람들이 양처럼 죽어 가는 끔찍한 광경이 있었다. 이것이 가장 많은 죽음을 낳았다. 한편으로 서로를 찾아가기를 두려워하면 돌봄 없이 죽어 갔으니 실제로 간병할 사람이 없어 사는 이가 모두 사라진 집이 많았고, 다른 한편으로 무릅쓰고 찾아가면 죽음이 그 결과였다. 선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그러했는데, 명예가 그들로 하여금 벗의 집에서 간병하는 일에 자기를 아끼지 않게 만들었고, 그 집에서는 마침내 가족들까지 죽어 가는 이들의 신음에 지쳐 재앙의 힘에 굴복했다. 그러나 병자와 죽어 가는 이들이 가장 큰 동정을 얻은 것은 병에서 회복된 사람들에게서였다. 이들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겪어서 알았고 이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없었으니, 같은 사람이 두 번 붙잡히는 일은 없었고 적어도 두 번째가 목숨을 앗아 가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남들의 축하를 받았을 뿐 아니라 자기들 또한 그 순간의 들뜬 기분에 앞으로는 어떤 병에서도 안전하다는 헛된 희망을 반쯤 품었다.

이미 있던 재앙을 더 무겁게 만든 것은 시골에서 도시로 밀려든 사람들이었고, 이는 새로 들어온 이들이 특히 절실하게 느꼈다. 그들을 받아들일 집이 없었으므로 한 해의 더운 철에 숨 막히는 판잣집에 묵어야 했고, 거기에서 죽음이 거리낌 없이 날뛰었다. 죽어 가는 사람의 몸이 서로 겹쳐 누워 있었고, 반쯤 죽은 것들이 거리를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물을 바라는 마음으로 모든 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지낸 신성한 곳들 또한 거기에서 죽은 사람들의 주검으로, 죽은 그 모습 그대로 가득했으니, 재앙이 모든 한계를 넘어섰으므로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 채 신성한 것이든 세속의 것이든 무엇에도 완전히 무심해졌기 때문이다. 전에 쓰이던 장례의 모든 의식이 온통 뒤집혔고, 그들은 되는 대로 주검을 묻었다. 이미 벗이 너무 많이 죽어 마땅한 도구를 갖추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더없이 부끄러운 매장에 의지했는데, 어떤 때는 장작을 쌓아 놓은 자들을 앞질러 그 남의 장작더미 위에 자기 쪽 주검을 던져 놓고 불을 붙였고, 어떤 때는 나르고 있던 주검을 이미 타고 있는 다른 주검 위에 얹어 놓고 그대로 가 버렸다.

역병에서 비롯된 무법의 방종이 이것 하나만은 아니었다. 번영을 누리던 자가 갑자기 죽고 전에 아무것도 없던 자가 그 재산을 물려받는 그 빠른 뒤바뀜을 본 사람들은, 전에는 구석에서 그것도 마음대로는 하지 못하고 하던 일을 이제 태연히 무릅쓰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목숨도 재물도 한가지로 하루짜리 것이라고 여겨 빨리 쓰고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사람들이 명예라 부르던 것을 끝까지 지키는 일은 누구에게도 인기가 없었는데 그 목적에 이를 때까지 목숨이 남아 있을지가 너무나 불확실했기 때문이며, 대신 지금의 즐거움과 그에 보탬이 되는 모든 것이 명예롭고도 유익하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들을 억제할 신의 두려움도 사람의 법도 없었다. 앞의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한결같이 죽어 가는 것을 보았으므로 신을 받들든 받들지 않든 매한가지라고 판단했고, 뒤의 것에 대해서는 자기 죄로 재판에 불려 나갈 때까지 살아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오히려 저마다 훨씬 더 가혹한 선고가 이미 모두에게 내려져 늘 머리 위에 걸려 있다고 느꼈으니 그것이 떨어지기 전에 삶을 조금 즐기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일 뿐이었다.

재앙의 성질은 그러했고, 그것은 아테네인들을 무겁게 짓눌렀다. 도시 안에서는 죽음이 날뛰고 바깥에서는 땅이 짓밟혔다. 그 고통 속에서 그들이 떠올린 것들 가운데는, 아주 자연스럽게도, 오래전에 읊어졌다고 노인들이 말하는 다음의 시구가 있었다.

도리스 전쟁이 오고 그와 함께 죽음이 오리라.1

그래서 그 시구의 낱말이 기근이지 죽음이 아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논쟁이 일었다. 그러나 지금의 고비에서는 물론 뒤의 것으로 결론이 났으니, 사람들이 자기들의 기억을 자기들의 고통에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뒷날 또 다른 도리스 전쟁이 우리에게 닥치고 마침 기근이 그와 함께 온다면 그 시구는 아마 그에 맞게 읽힐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에게 내려졌던 신탁 또한 그것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제 떠올랐다. 전쟁에 나서야 할지 신에게 물었을 때, 신은 그들이 힘을 다해 싸우면 승리가 그들의 것이 될 것이며 자기도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답했다. 사건들이 이 신탁과 들어맞는다고 여겨졌다.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아티카를 침공하자마자 역병이 터졌고, 역병은 펠로폰네소스에는 적어도 이야기할 만한 정도로는 들어가지 않은 채 아테네에서 가장 심하게 휩쓸었으며, 아테네 다음으로는 그 밖의 도시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은 곳들에서 그랬기 때문이다. 역병의 경과는 그러했다.

펠로폰네소스인들은 평야를 짓밟은 뒤 파랄리아 지역으로 나아가 아테네의 은광이 있는 라우리온까지 이르렀고, 먼저 펠로폰네소스를 바라보는 쪽을 짓밟고 다음으로 에우보이아와 안드로스를 마주 보는 쪽을 짓밟았다. 그러나 아직 장군직에 있던 페리클레스는 앞선 침공 때와 같은 생각을 지켰고, 아테네인들이 그들에게 맞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평야에 있고 파랄리아 땅에 들어서지 않았을 때, 그는 펠로폰네소스로 갈 함선 100척의 군비를 갖추어 두었고 모든 준비가 끝나자 바다로 나갔다. 배에는 아테네의 중장보병 4,000명을 태웠고 기병 300명을 기병 수송선에 태웠는데, 그 수송선은 그때 처음으로 낡은 군선을 고쳐 만든 것이었다. 키오스와 레스보스의 배 50척도 이 원정에 함께했다. 이 아테네 군대가 바다로 나갈 때 그들은 아티카의 파랄리아 지역에 펠로폰네소스인들을 남겨 두고 떠났다. 펠로폰네소스의 에피다우로스에 이른 그들은 그 땅 대부분을 짓밟았고 공격으로 그 도시를 손에 넣을 희망까지 품었으나, 이 일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에피다우로스에서 출항한 그들은 모두 펠로폰네소스 해안의 도시인 트로이젠과 할리에이스와 헤르미오네의 땅을 짓밟았고, 거기에서 라코니아의 바닷가 도시 프라시아이로 항해해 그 땅 일부를 짓밟고 그 도시 자체를 손에 넣어 약탈했으며, 그 뒤 본국으로 돌아왔으나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이미 떠나 아티카에 더는 없음을 알게 되었다.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아티카에 있고 아테네인들이 배를 타고 원정에 나가 있던 그 기간 전체에 걸쳐, 원정군에서도 아테네에서도 사람들이 역병으로 계속 죽어 갔다. 실제로 펠로폰네소스인들이 그 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서둘러 떠났다는 주장까지 있었는데, 그들은 탈영병들에게서 그 병이 도시 안에 있다는 말을 들었고 장례가 치러지는 것을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침공에서 그들은 다른 어느 때보다 오래 머물며 온 나라를 짓밟았으니, 아티카에 40일쯤 있었다.

같은 여름에 페리클레스의 동료인 니키아스의 아들 하그논과 클레이니아스의 아들 클레오폼포스가 그가 얼마 전에 썼던 그 군대를 이끌고, 트라키아 방면의 칼키디케인과 아직 포위 중이던 포티다이아를 치러 원정을 떠났다.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포티다이아에 공성 기계를 들이대고 온갖 방도로 그곳을 손에 넣으려 했으나, 도시를 함락시키는 데도 그들의 준비에 걸맞은 그 밖의 어떤 일을 해내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다. 역병이 여기에서도 그들을 덮쳐 그들을 완전히 주저앉힐 만큼 큰 피해를 입혔으니, 앞선 원정에 나가 그때까지 건강했던 병사들까지 하그논의 군대에서 병이 옮았으며, 포르미온과 그가 지휘한 1,600명은 더는 칼키디케인 근처에 있지 않았던 덕분에 겨우 그것을 면했다. 결국 하그논은 40일쯤 만에 중장보병 4,000명 가운데 1,050명을 잃고서 배를 이끌고 아테네로 돌아갔으나, 전부터 그곳에 배치되어 있던 병사들은 그 나라에 남아 포티다이아 포위를 이어 갔다.

펠로폰네소스인들의 두 번째 침공 뒤에 아테네인들의 마음에 변화가 왔다. 그들의 땅은 이제 두 번 짓밟혔고, 전쟁과 역병이 한꺼번에 그들을 무겁게 눌렀다. 그들은 전쟁을 일으킨 자이며 자기들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고 페리클레스를 탓하기 시작했고, 스파르타와 화해하고 싶어 안달했으며, 실제로 그곳에 사절을 보냈으나 그 사절들은 임무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의 절망은 이제 완전한 것이 되었고 그 전부가 페리클레스에게 쏟아졌다. 그는 그들이 지금의 사태 전개에 격분하여 자기가 예상한 그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아직 장군직에 있었다는 점이다) 자신감을 되살리는 것과 그들을 이 노여움의 감정에서 더 차분하고 더 희망을 품은 마음 상태로 이끄는 것, 이 두 가지 목적으로 민회를 소집했다. 그는 그렇게 앞에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받아 온 이 노여움을 저는 대비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원인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 점을 여러분에게 일깨우고, 여러분이 저에게 까닭 없이 노여워하거나 겪는 고통에 기가 죽는 일에 항의하려고 민회를 소집했습니다. 저는 나라의 위대함이, 공적인 굴욕과 짝을 이룬 어떤 개인의 안녕보다 사사로운 시민에게 더 이롭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개인으로서 아무리 잘살더라도 그 나라가 망하면 그도 함께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번영하는 나라는 불행한 개인에게 언제나 살아날 기회를 줍니다. 그러니 나라는 사사로운 시민의 불행을 떠받칠 수 있지만 그들은 나라의 불행을 떠받칠 수 없으므로, 나라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임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처럼 집안의 괴로움에 정신을 잃고 공동의 안전에 대한 생각을 모두 버리며 전쟁을 권했다고 저를 탓하고 그것을 표로 정했다고 여러분 자신을 탓하는 것이 의무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이 저에게 노여워한다면, 그것은 제가 믿는 바로는 올바른 정책을 아는 데서도 그것을 밝혀 설명하는 능력에서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며 게다가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정직한 사람에게 노여워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을 지녔으나 밝혀 설명하는 재능이 없는 사람은 그 문제에 아무 생각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 재능을 다 가졌으되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이익을 위한 차가운 변호인에 그칠 것이고, 그 나라 사랑이 뇌물을 견디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값에 팔려 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제 조언을 받아들여 전쟁에 나섰을 때 제가 이런 자질에서 그럭저럭이라도 남보다 낫다고 생각했다면, 이제 제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책망을 받아야 할 이유는 분명히 없습니다.

물론 이 문제에서 자유로이 고를 수 있고 자기 운명이 걸려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쟁은 가장 큰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고를 수 있는 길이 독립을 잃고 굴복하는 것과 그 독립을 지킬 희망을 품고 위험을 무릅쓰는 것 둘뿐이었다면, 그런 경우에 책망을 받아야 할 사람은 위험을 무릅쓰려는 사람이 아니라 무릅쓰려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저는 같은 사람이고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달라지는 쪽은 여러분입니다. 실제로 여러분은 다치지 않았을 때 제 조언을 받아들였고 불행이 닥치기를 기다려 그것을 후회했으며, 제 정책이 잘못으로 보이는 까닭은 여러분의 결심이 허약한 데 있습니다. 그 정책이 가져오는 고통은 여러분 가운데 누구나 겪고 있는데 그 이로움은 아직 누구에게나 멀고 희미하며, 크고 갑작스러운 역경이 여러분에게 닥치는 바람에 여러분의 마음이 너무 가라앉아 결심을 끝까지 지켜 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갑작스럽고 뜻밖이며 헤아림에 가장 들어오지 않는 것 앞에서 정신은 위축되기 마련이며,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두더라도 역병은 분명히 그런 종류의 비상사태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위대한 나라의 시민으로 태어났고 그 태생에 걸맞은 습속으로 길러졌으니, 가장 큰 재앙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여러분 이름의 빛을 흠 없이 지켜야 합니다. 사람들의 판정은 제 몫보다 높이 오르려는 교만을 시샘하는 것만큼이나 이미 인정받은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약함에도 무자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사로운 괴로움을 슬퍼하기를 그치고, 그 대신 나라의 안전에 마음을 쏟으십시오.

전쟁이 요구하는 수고 앞에서 여러분이 물러서고 그것이 결국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할까 두려워한다면, 여러분의 걱정에 근거가 없음을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증명해 보인 그 이유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모자란다면, 여러분의 지배권이 큰 데서 나오는 이점 하나를 이제 밝히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직 여러분에게 떠오른 적이 없는 것이고, 제가 앞선 연설에서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것이며, 그 울림이 어찌나 대담한지 제 주위에 보이는 이 부자연스러운 낙담이 없었다면 지금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여러분의 제국이 동맹들에게만 미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진실을 알리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활동의 무대에는 두 부분이 있습니다. 땅과 바다입니다. 이 가운데 하나의 전부에서 여러분은 완전히 으뜸이니, 지금 쓰고 있는 범위에서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알맞다고 여기는 어떤 더 넓은 범위에서도 그렇습니다. 요컨대 여러분의 해군 자원은, 대왕도 땅 위의 다른 어떤 나라도 그것을 막을 수 없이 여러분의 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을 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과 집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을 여러분이 큰 박탈로 여길지라도 이 힘은 그와는 아주 다른 것임을 보아야 하며, 그것들 때문에 애태우기보다는 실로 그것들을 큰 재산을 꾸미는 정원이나 그 밖의 부속물쯤으로 여기고 견주어 보면 하찮은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또 여러분의 노력으로 지켜 낸 자유는 우리가 잃은 것을 쉽게 되찾아 줄 것이나 한번 무릎을 굽히면 지금 가진 것마저 여러분에게서 떠나갈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아버지들은 이 재산을 남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 손에서 얻었으며, 자기들의 수고로 얻은 것을 놓쳐 버리지 않고 여러분에게 온전히 넘겨주었습니다. 적어도 이 점에서 여러분은 자기들이 그들과 동등함을 증명해야 하니, 얻은 것을 잃는 것이 얻으려다 막히는 것보다 더 수치스럽다는 것을 기억하고 적을 기백만이 아니라 멸시로 맞서야 합니다. 자신감이야 행복한 무지도 줄 수 있고, 그렇습니다, 겁쟁이의 가슴에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멸시는 우리처럼 자기가 상대보다 낫다는 것을 헤아림으로 확인한 자들만의 특권입니다. 그리고 승산이 같은 자리에서 지식은 그 결과인 경멸로써 용기를 튼튼하게 하며, 그 지식이 믿음을 두는 곳은 절망한 자의 지팡이인 희망이 아니라 지금 가진 자원에 근거한 판단이니 그 판단의 예상이 더 믿을 만한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나라는 그 지위의 영광을 떠받치는 일에 여러분이 힘을 바치기를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영광은 여러분 모두가 함께 누리는 자랑거리이며, 여러분은 제국의 짐을 마다하면서 그 명예를 나누어 갖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또 여러분이 맞서 싸우는 것이 독립과 맞바꾸는 노예 상태만이 아니라 제국을 잃는 일이며 그것을 행사하면서 쌓은 원한에서 오는 위험이기도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게다가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이 순간의 두려움 속에서 그런 야심 없는 처신의 정직함에 반해 버렸다 하더라도, 이제 물러서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쥐고 있는 것은 다소 노골적으로 말하면 참주의 권력이니, 그것을 쥔 일은 어쩌면 잘못이었겠으나 그것을 놓는 일은 위험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러서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남들을 제 편으로 돌리면 나라를 금세 망칠 것이며, 그들이 홀로 독립해 살 수 있다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물러서려 하고 야심 없는 자들은 곁에 힘센 보호자가 없으면 결코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그런 자질은 제국의 도시에는 쓸데없는 것이며, 다만 속국이 시달림 없는 종살이에 이르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런 시민들에게 꾀여서는 안 되며 저에게 노여워해서도 안 됩니다. 제가 전쟁에 찬성표를 던졌다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한 것과 똑같이 한 것일 뿐입니다. 적이 여러분의 나라를 침공하여, 여러분이 그의 요구를 따르기를 거절한다면 그가 반드시 하리라고 여러분이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그 일을 했다 해도 그렇고, 우리가 헤아려 둔 것에 더해 역병이 우리에게 닥쳤다 해도 그렇습니다. 실로 우리의 계산이 틀린 곳은 이 한 가지뿐입니다. 제가 그렇지 않았다면 받았을 것보다 더 큰 미움을 받게 된 데에 이것이 큰 몫을 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것은 전혀 마땅하지 않은 일이니, 우연이 여러분에게 안겨 줄 어떤 성공에 대해서도 여러분이 저에게 공을 돌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렇습니다. 게다가 하늘의 손은 체념으로 견뎌야 하고 적의 손은 굳센 마음으로 견뎌야 합니다. 이것이 아테네의 오래된 방식이었으니, 여러분은 그것이 지금도 그러한 것을 막지 마십시오. 또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나라가 온 세상에서 가장 큰 이름을 가졌다면, 그것은 그 나라가 재앙 앞에서 한 번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며, 다른 어떤 도시보다 많은 목숨과 수고를 전쟁에 쏟아 여태까지 알려진 어떤 것보다 큰 힘을 제 것으로 얻었고 그 기억이 가장 먼 후손에게까지 내려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쇠퇴의 일반 법칙에 따라 우리가 언젠가 굽히도록 내몰린다 하더라도, 우리가 다른 어떤 그리스 국가보다 많은 그리스인을 다스렸고 그들의 연합한 힘에 맞서서도 갈라진 힘에 맞서서도 가장 큰 전쟁들을 버텨 냈으며 자원에서도 규모에서도 다른 어느 곳과도 견줄 수 없는 도시에 살았다는 것은 그래도 기억될 것입니다. 이 영광은 느리고 야심 없는 자들의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활력 있는 가슴에서는 그것이 본받으려는 마음을 깨우고, 그것 없이 지내야 하는 자들에게는 시샘 섞인 아쉬움을 깨울 것입니다. 남을 다스리려 한 모든 자에게 당장의 미움과 인기 없음은 언제나 돌아온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움을 사야 하는 자리라면 참된 지혜는 가장 높은 목적을 위해 그것을 삽니다. 미움 또한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빛나는 것과 미래의 영광을 만드는 것은 영원히 잊히지 않고 남습니다. 그러므로 그때의 영광과 지금의 명예를 위해 결정하고, 당장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두 목적을 함께 이루십시오. 스파르타에 전령을 보내지 말고 지금 겪는 고통에 짓눌린다는 낌새를 조금도 드러내지 마십시오. 재앙에 마음이 가장 덜 흔들리고 그것을 맞서는 손이 가장 빠른 자들이 가장 위대한 사람이며 가장 위대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페리클레스가 자기를 향한 아테네인들의 분노를 고치고 그들의 생각을 당장의 괴로움에서 돌려놓으려 쓴 논증은 그러했다. 공동체로서 그는 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그들은 스파르타에 사람을 보낼 생각을 모두 버렸을 뿐 아니라 전쟁에 더 큰 힘을 쏟았다. 그러나 사사로운 개인으로서는 겪는 고통에 쓰라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 보통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것을 빼앗겼고 높은 계층은 시골의 값진 시설과 건물을 갖춘 좋은 재산을 잃었으며 무엇보다 나쁘게도 평화 대신 전쟁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를 향한 여론은 그가 벌금을 물게 되기까지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군중의 방식대로 그들은 그를 다시 장군으로 뽑아 모든 일을 그의 손에 맡겼는데, 이제 사사롭고 집안에 얽힌 괴로움에 덜 예민해졌고 공적인 필요에는 그가 누구보다 가장 나은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평화 시절에 그가 나라의 머리에 있는 동안 그는 절제된 보수적 정책을 밀고 나갔고, 그의 시대에 나라의 위대함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도 그는 자기 나라의 힘을 바르게 재어 본 듯하다. 그는 전쟁이 시작된 뒤 2년 6개월을 더 살았고, 전쟁에 관한 그의 예견이 옳았다는 것은 그의 죽음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는 그들에게 조용히 기다리고 해군에 마음을 쓰고 새로운 정복을 시도하지 말고 전쟁 동안 도시를 어떤 위험에도 내놓지 말라고 말했으며, 그렇게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들이 한 것은 바로 그 반대였으니, 보기에 전쟁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서 사사로운 야심과 사사로운 이익이 자기들을 이끌어 자기들에게도 동맹들에게도 부당한 계획으로 끌고 가게 놓아두었는데, 그것은 성공해도 사사로운 개인의 명예와 이익에나 도움이 될 계획이었고 실패하면 전쟁을 치르는 나라에 확실한 재앙을 안기는 계획이었다. 그 원인은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다. 페리클레스는 실로 그 지위와 능력과 널리 알려진 청렴함으로 군중을 독립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으니, 요컨대 그들에게 끌려가는 대신 그들을 이끌 수 있었다. 그는 옳지 않은 수단으로 권력을 구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아첨할 필요가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반대로 평판이 하도 높아 반대하여 그들을 노엽게 할 여유를 누렸다. 그들이 때에 맞지 않게 오만하게 들뜬 것을 볼 때마다 그는 한마디로 그들을 놀라 움츠러들게 했고, 반대로 그들이 공포에 사로잡히면 곧바로 자신감을 되돌려 줄 수 있었다. 요컨대 이름으로는 민주정이던 것이 그의 손에서 으뜸 시민의 통치가 되었다. 그를 이은 자들에게서는 사정이 달랐다. 서로 더 비슷한 처지였고 저마다 으뜸 자리를 움켜쥐려 했으므로, 그들은 끝내 나라의 일을 꾸리는 것까지 군중의 변덕에 맡기고 말았다. 크고 주권을 가진 나라에서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이것은 수많은 실책을 낳았고 그 가운데 시칠리아 원정이 있었는데, 다만 이 원정이 실패한 것은 그것이 겨눈 상대의 힘을 잘못 계산한 탓보다는 보낸 자들이 그 뒤에 나가 있는 자들을 돕는 데 가장 좋은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민중의 지도권을 두고 사사로운 파벌 다툼에 매달리기를 골랐다는 잘못 탓이었으며, 그 다툼으로 그들은 싸움터의 작전을 마비시켰을 뿐 아니라 본국에 내부의 불화까지 처음으로 끌어들였다. 그런데도 시칠리아에서 다른 병력에 더해 함대의 대부분을 잃고 도시 안에서 이미 파벌이 우세해진 뒤에도, 그들은 3년 동안 본래의 적들을 버텨 냈으니 그 적들에는 시칠리아인뿐 아니라 거의 모두 반란을 일으킨 자기들의 동맹들까지 가담했고 마지막에는 펠로폰네소스 해군에 자금을 댄 대왕의 아들 키루스까지 가담했다. 그리고 그들은 제 안의 내분에 희생되기까지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페리클레스의 천재가 도움받지 못한 펠로폰네소스인의 힘을 상대로 전쟁에서 쉬운 승리를 내다본 근거가 된 그 자원은 그토록 넘치도록 넉넉한 것이었다.

같은 여름에 스파르타인과 그 동맹들은 함선 100척으로 자킨토스를 치러 원정을 떠났다. 엘리스 해안 앞바다에 놓인 섬으로, 펠로폰네소스에서 온 아카이아인 식민단이 사는 곳이며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배에는 스파르타의 중장보병 1,000명이 타고 있었고, 스파르타 시민2인 크네모스가 제독이었다. 그들은 배에서 내려 그 나라 대부분을 짓밟았으나, 주민들이 굴복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같은 여름이 끝날 무렵 코린트인 아리스테우스와 스파르타에서 온 사절인 아네리스토스와 니콜라오스와 스트라토데모스, 그리고 테게아인 티마고라스와 아르고스에서 온 폴리스라는 개인이 대왕을 설득해 자금을 대고 전쟁에 함께하게 하려고 아시아로 가는 길에, 트라키아의 테레스의 아들 시탈케스에게 왔다. 될 수 있으면 그를 꾀어 아테네와의 동맹을 버리고 그때 아테네 병력에 포위되어 있던 포티다이아로 진군하게 하려는 생각이었고, 아울러 그의 힘으로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목적지인 파르나바조스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려는 생각이었는데, 파르나바조스가 그들을 내륙으로 올려 보내 대왕에게 이르게 할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침 시탈케스의 곁에 아테네 사절 몇이 있었으니 칼리마코스의 아들 레아르코스와 필레몬의 아들 아메이니아데스였고, 이들은 새로 아테네 시민이 된 시탈케스의 아들 사도코스를 설득해 그 사람들을 자기들 손에 넘기게 하여, 그들이 대왕에게 건너가 그가 고른 나라를 해치는 데 제 몫을 하는 일을 막게 했다. 그에 따라 그는 레아르코스와 아메이니아데스와 함께 미리 보낸 무리로 하여금 그들이 헬레스폰토스를 건널 배로 가려고 트라키아를 지나가는 중에 그들을 붙잡게 했고 아테네 사절들에게 넘기라고 명령했으며, 사절들은 그들을 아테네로 데려갔다. 그들이 도착하자 아테네인들은 포티다이아와 자기들의 트라키아 영지를 둘러싼 앞선 일들에서 눈에 띄게 주동자였던 아리스테우스가 빠져나가면 살아남아 자기들에게 더 큰 해를 끼칠까 두려워, 재판도 열지 않고 그들이 하고자 한 변호도 듣지 않은 채 그날 안에 그들을 모두 죽이고 그 주검을 구덩이에 던졌다. 스파르타인들이 펠로폰네소스 주변에서 상선에 타고 있다가 붙잡힌 아테네인과 동맹의 상인을 모두 죽여 구덩이에 던지면서 시작한 그 전쟁 방식을 보복으로 쓰는 것이 자기들에게 정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쟁이 시작될 무렵 스파르타인들은 아테네의 동맹이든 중립국 사람이든 바다에서 붙잡은 모든 사람을 적으로 여겨 도륙했다.

같은 무렵 여름이 저물어 갈 때, 암브라키아 병력이 자기들이 모은 수많은 이방인과 함께 암필로키아의 아르고스와 그 나라의 나머지를 치러 진군했다. 그들이 아르고스인에게 품은 원한의 기원은 이러했다. 이 아르고스와 암필로키아의 나머지는 암피아라오스의 아들 암필로코스가 식민한 곳이었다. 트로이 전쟁 뒤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 사정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암브라키아만에 이 도시를 세우고, 제 나라의 이름을 따 아르고스라 불렀다. 이곳은 암필로키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그 주민은 가장 강력했다. 여러 세대가 지난 뒤 불행에 몰린 그들은 암필로키아 국경의 이웃인 암브라키아인을 불러들여 제 식민시에 함께 살게 했고, 암브라키아인과 이렇게 하나가 된 덕분에 지금 쓰는 그리스 말을 배웠으니, 암필로키아인의 나머지는 이방인이었다. 얼마 뒤 암브라키아인은 아르고스인을 내쫓고 그 도시를 자기들이 차지했다. 이에 암필로키아인은 아카르나니아인에게 자기들을 맡겼고, 둘은 함께 아테네인을 불렀으며, 아테네인은 포르미온을 장군으로 하여 배 30척을 보냈다. 그들이 도착하자 암필로키아인과 아카르나니아인은 아르고스를 공격으로 손에 넣고 암브라키아인을 노예로 만들었으며, 그 도시에 함께 살았다. 이 일 뒤에 아테네인과 아카르나니아인 사이의 동맹이 시작되었다. 암브라키아인이 아르고스인에게 품은 원한은 이렇게 자기 시민이 노예가 된 일에서 시작되었고, 그 뒤 전쟁 동안 그들은 자기들과 카오니아인과 그 밖의 이웃 이방인들 사이에서 이 병력을 모았다. 아르고스 앞에 이른 그들은 그 땅의 주인이 되었으나, 도시를 치는 일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으므로 본국으로 돌아가 저마다 제 종족에게로 흩어졌다.

여름의 일들은 그러했다. 이어진 겨울에 아테네인들은 배 20척을 펠로폰네소스 주변으로 보냈는데 포르미온의 지휘 아래였고, 그는 나우팍토스에 자리를 잡고 코린트와 크리사 만으로 드나드는 자를 경계해 지켰다. 다른 6척은 멜레산드로스의 지휘 아래 카리아와 리키아로 갔으니, 그 지역에서 조공을 걷고 아울러 펠로폰네소스의 사략선이 그 바다에 자리를 잡아 파셀리스와 페니키아와 그에 잇닿은 대륙에서 오는 상선의 통행을 괴롭히는 일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멜레산드로스는 배에서 내린 아테네 병력과 동맹 병력을 이끌고 리키아 내륙으로 올라갔다가 싸움에서 패해 죽었고 병사 다수를 잃었다.

같은 겨울에 포티다이아인은 마침내 자기들을 포위한 자들에게 더는 버틸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아티카를 쳐들어간 일은 아테네인들이 포위를 풀게 하는 바라던 효과를 내지 못했다. 식량은 하나도 남지 않았고, 먹을 것이 없는 고통이 포티다이아에서 어찌나 심해졌는지 그 밖의 여러 끔찍한 일에 더해 사람들이 서로를 먹은 일까지 있었다. 이 막다른 처지에서 그들은 마침내 자기들을 맞아 지휘하던 아테네 장군들에게 항복을 제안했는데, 에우리피데스의 아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클레이데스의 아들 헤스티오도로스와 칼리마코스의 아들 파노마코스였다. 장군들은 그토록 드러난 자리에 놓인 군대의 고생을 보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으며, 게다가 나라는 이미 그 포위에 탈란톤3 2,000을 쓴 터였다. 항복 조건은 이러했다. 그들 자신과 그들의 아이와 아내와 원군은 자유로이 나갈 수 있고, 한 사람에게 옷 한 벌씩 여자에게는 두 벌씩, 그리고 여행에 쓸 정해진 액수의 돈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이 협정에 따라 그들은 저마다 힘이 닿는 대로 칼키디케와 그 밖의 곳으로 나갔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본국의 지시 없이 조건을 내주었다고 장군들을 탓했는데, 그곳이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뒤 포티다이아에 자기들의 정착민을 보내 그곳을 식민시로 삼았다. 겨울의 일들은 그러했고, 투키디데스가 그 역사를 기록한 이 전쟁의 둘째 해는 그렇게 끝났다.

주

  1. 1. 죽음과 기근 — 크롤리의 영역본은 이 시구의 낱말을 death(죽음)로 옮기고, 논쟁의 대상이 된 낱말을 그와 소리가 닮은 dearth(기근)로 옮겨 원문의 말장난을 살렸다. 한국어로는 두 낱말의 소리가 닮지 않으므로 그 효과가 그대로 옮겨지지 않는다.

  2. 2. 스파르타 시민 — 스파르타 사회는 완전시민권을 가진 스파르타 시민, 주변 자유민, 헬롯으로 나뉘었다. 원문에서 저자는 이 좁은 뜻의 '스파르타 시민'과 국가 전체를 가리키는 '스파르타(라케다이몬)'를 구분해 쓴다.

  3. 3. 탈란톤 — 그리스의 무게 단위이자 화폐 단위. 1탈란톤은 6,000드라크메에 해당했다고 전한다. 현대 화폐로 환산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