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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사13장 (제IV권 제XIII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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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제IV권 제XIII장) 전쟁 제7년과 제8년 · 코르키라 내란의 종결 · 겔라의 강화 · 니사이아 함락

같은 여름, 이 일들이 있은 직후 아테네인들은 함선 80척과 아테네 중장보병 2,000명, 그리고 기병 수송선에 태운 기병 200명을 이끌고 코린트 땅을 치러 나섰는데, 동맹에서는 밀레토스인과 안드로스인과 카리스토스인이 함께했고 지휘는 니케라토스의 아들 니키아스가 동료 두 사람과 함께 맡았다. 바다로 나아간 그들은 날이 밝을 무렵 케르소네소스와 레이토스 사이, 솔리기아 언덕 아래 땅의 해안에 배를 댔다. 옛적에 도리스인이 자리를 잡고 코린트에 살던 아이올리스인과 전쟁을 벌인 곳이 그 언덕이며, 지금은 그곳에 솔리기아라 불리는 마을이 서 있다. 함대가 닿은 해안은 그 마을에서 약 1.5마일1, 코린트에서 7마일, 이스트모스에서 2.25마일 떨어져 있다. 코린트인들은 아테네 원정군이 온다는 것을 아르고스에서 전해 듣고 오래전에 모두 이스트모스로 올라와 있었는데, 이스트모스 너머에 사는 자들과 암브라키아와 레우카스에 수비대로 나가 있던 500명만은 빠졌다. 그들은 총동원 병력으로 그곳에 머물며 아테네인들이 상륙하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어둠을 타고 들어와 그들의 눈을 피했다. 신호로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코린트인들은 아테네인들이 크롬미온을 치러 갈 경우에 대비해 절반을 켄크레아이에 남겨 두고, 나머지는 서둘러 구원하러 행군했다.

그 싸움에 나와 있던 두 장군 가운데 하나인 바토스는 한 부대를 이끌고 성벽 없는 마을 솔리기아를 지키러 갔고, 리코프론은 나머지 병력과 함께 남아 싸움을 맡았다. 코린트인들은 먼저 케르소네소스 앞에 막 상륙한 아테네인의 오른쪽 날개를 쳤고, 그다음에 나머지 병력을 쳤다. 싸움은 완강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맞붙어 겨루는 백병전이었다. 대열 끝에 배치된 아테네인과 카리스토스인의 오른쪽 날개는 코린트인들을 맞아 어렵사리 물리쳤고, 코린트인들은 뒤쪽 비탈진 땅 위의 담으로 물러나 그들에게 돌을 굴려 내린 뒤 다시 파이안2을 부르며 내려왔으며, 아테네인들이 이들을 맞아 다시 가까이 붙어 싸웠다. 이때 코린트의 한 부대가 자기 쪽 왼쪽 날개를 도우러 와서 아테네인의 오른쪽 날개를 무너뜨리고 바다까지 쫓았으나, 거기서 이번에는 함선에서 내려온 아테네인과 카리스토스인에게 도로 밀려났다. 그러는 동안 양쪽의 나머지 병력도 끈질기게 싸웠으며 특히 코린트인의 오른쪽 날개가 그러했으니, 거기서 리코프론은 솔리기아 마을을 치러 갈까 염려되던 아테네인의 왼쪽 날개의 공격을 버텨 냈다.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은 채 오래 버틴 끝에, 적에게는 없는 기병의 도움을 받은 아테네인들이 마침내 코린트인들을 무너뜨렸고, 코린트인들은 언덕으로 물러나 그곳에 멈춰 서서 다시 내려오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들이 가장 많이 죽은 것이 이 오른쪽 날개의 붕괴에서였으며, 그들의 장군 리코프론도 그 가운데 있었다. 나머지 병력은 이렇게 부서져 달아났으나 본격적으로 쫓기거나 몰리지는 않았으므로 높은 땅으로 물러나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테네인들은 적이 더는 싸움을 걸어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적의 주검에서 무구를 벗기고 자기편 주검을 거둔 뒤 곧바로 전승 기념물을 세웠다. 그러는 동안 아테네인들이 크롬미온으로 배를 몰까 대비해 켄크레아이에 남아 있던 코린트인 절반은 오네이온 산에 가려 싸움을 보지는 못했으나 먼지를 보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채고 서둘러 구원하러 올라왔고, 도시에 있던 나이 많은 코린트인들도 벌어진 일을 알고 나서 그렇게 했다. 아테네인들은 그들이 모두 자기들을 향해 오는 것을 보고 이웃 펠로폰네소스인들에게서 증원이 오는 것이라고 여겨, 노획물과 자기편 주검을 거두어 서둘러 함선으로 물러났는데, 찾지 못해 남겨 둔 주검 두 구만은 예외였다. 배에 올라 건너편 섬들로 건너간 그들은 거기서 전령을 보내 휴전을 맺고 남겨 두었던 주검을 거두어 갔다. 그 싸움에서 코린트인은 212명이 쓰러졌고 아테네인은 50명에 조금 못 미쳤다.

아테네인들은 섬들에서 닻을 올려 같은 날 코린트 땅의 크롬미온으로 갔는데, 그곳은 도시에서 약 13마일 떨어져 있었다. 닻을 내린 그들은 그 땅을 짓밟고 거기서 밤을 지냈다. 이튿날 그들은 먼저 해안을 따라 에피다우로스 땅으로 가서 거기에 상륙한 뒤, 에피다우로스와 트로이젠 사이의 메타나에 이르러 반도의 지협을 가로질러 성벽을 쌓아 요새로 삼고 그곳에 초소를 두었으며, 그 뒤로 그 초소에서 트로이젠과 할리아이와 에피다우로스 땅으로 습격이 이루어졌다. 이곳에 성벽을 둘러친 뒤 함대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에우리메돈과 소포클레스3는 시칠리아로 가는 길에 아테네 함대를 이끌고 필로스에서 바다로 나아갔고, 코르키라에 이르러 도시 사람들과 함께 이스토네 산에 자리 잡은 무리를 치러 나섰다. 내가 앞서 말한 대로 그 무리는 내란이 끝난 뒤 건너가 그 땅을 손에 넣고 주민들에게 큰 해를 끼치던 자들이었다. 공격으로 그들의 요새가 떨어지자 지키던 자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어느 높은 땅으로 피했고 거기서 항복했는데, 용병 원군을 내주고 무기를 내려놓고 자기들의 처분을 아테네 민중에게 맡긴다는 조건이었다. 장군들은 휴전 아래 그들을 프티키아 섬으로 실어 보내 아테네로 보낼 수 있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했는데, 달아나다 붙잡히는 자가 하나라도 나오면 전부가 이 협정의 혜택을 잃는다는 양해가 붙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 코르키라 민중파의 지도자들은 아테네인들이 포로들의 목숨을 살려 줄까 두려워 다음과 같은 계략을 썼다. 그들은 벗들을 몰래 섬으로 보내어 그곳에 있는 몇몇을 꾀어냈으니, 그 벗들이 받은 지시는 그 포로들에게 배 한 척을 마련해 주고, 마치 포로들 자신을 위하는 것처럼 아테네 장군들이 그들을 코르키라 사람들에게 넘기려 하니 되도록 빨리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라고 일러 주라는 것이었다.

이 말이 먹혀들어, 그 사람들이 마련된 배를 타고 나가다 붙잡히도록 일이 짜였고, 그에 따라 협정은 무효가 되었으며 포로 전부가 코르키라인에게 넘겨졌다. 이 결과에는 아테네 장군들의 책임이 컸다. 시칠리아로 떠나 그 사람들을 아테네로 데려가는 영예를 남에게 넘기기를 그들이 내켜 하지 않는 것이 훤히 드러났고, 그것이 음모를 꾸민 자들의 계획에 힘을 실어 주었으며 그들이 한 말이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렇게 넘겨진 포로들을 코르키라인은 큰 건물 하나에 가두었다가 뒤에 20명씩 끌어내어 서로 묶은 채 양옆으로 늘어선 두 줄의 중장보병 사이로 지나가게 했으며, 줄에 선 자들은 제 원수가 지나가는 것을 볼 때마다 때리고 찔렀다. 그 곁에서는 채찍을 든 자들이 함께 걸으며 너무 느리게 걷는 자들을 재촉했다.

이런 식으로 60명이나 되는 사람이 끌려 나가 죽었으나 건물 안에 있던 그 벗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으니, 그저 한 감옥에서 다른 감옥으로 옮겨지는 줄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누군가가 그들의 눈을 열어 사실을 알려 주자, 그들은 아테네인들을 향해 정 그럴 뜻이라면 당신들 손으로 우리를 죽이라고 외쳤고 더는 건물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했으며 누구도 안으로 들이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코르키라인은 문으로 밀고 들어가기를 꺼려 건물 꼭대기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기와를 던져 내리고 화살을 쏘아 댔으며, 포로들은 힘닿는 대로 몸을 가렸다. 그러는 동안 그들 대다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에 매달렸으니, 적이 쏜 화살을 제 목에 찔러 넣기도 하고 마침 거기 있던 침상에서 뽑은 끈이나 제 옷을 찢어 만든 띠로 목을 매기도 했다. 요컨대 스스로를 죽이는 데 쓸 수 있는 온갖 수단을 다 썼으며, 지붕 위에 있는 적이 던지는 것에 맞아 죽기도 했다. 이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동안 밤이 왔고, 그 일이 끝나기까지 밤은 거의 다 지나갔다. 날이 밝자 코르키라인은 그들을 짐수레에 켜켜이 쌓아 도시 밖으로 실어 냈다. 요새에서 붙잡은 여자들은 모두 노예로 팔렸다. 이렇게 해서 산에 있던 코르키라인들은 민중파에게 멸망했고, 그리하여 끔찍한 극단을 다 겪은 뒤에 당파 싸움이 끝났으니 적어도 이 전쟁의 기간에 관한 한 그러했다. 한쪽 당파에게는 사실상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아테네인들은 원래 목적지인 시칠리아로 떠나 그곳의 동맹들과 함께 전쟁을 이어 갔다.

여름이 저물 무렵 나우팍토스에 있던 아테네인들과 아카르나니아인들은 암브라키아만 어귀에 자리한 코린트의 도시 아낙토리온을 치러 나아가 배신으로 그곳을 빼앗았고, 아카르나니아인들은 아카르나니아 곳곳에서 정착민을 보내 그곳을 차지했다.

이렇게 여름이 끝났다. 이어진 겨울에, 동맹들에게서 돈을 걷으러 보낸 아테네 함선의 지휘자 가운데 하나인 아르킵포스의 아들 아리스테이데스가 스트리몬 강가의 에이온에서 페르시아 사람 아르타페르네스를 붙잡았는데, 그는 왕에게서 스파르타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아테네로 끌려갔고, 아테네인들은 그가 지닌 공문서를 아시리아 문자에서 옮기게 하여 읽었다. 그 글은 다른 여러 문제를 두루 언급하면서도 요지는 이러했으니, 스파르타인들이 보낸 많은 사절 가운데 같은 말을 하는 자가 둘도 없었으므로 왕은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고, 다만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뜻이 있다면 이 페르시아 사람과 함께 사절을 보내도 좋다는 것이었다. 아테네인들은 그 뒤 아르타페르네스를 갤리선에 태워 에페소스로 돌려보내면서 사절들을 함께 보냈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크세르크세스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이 그 무렵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같은 겨울에 키오스인은 아테네인의 명령에 따라 자기들의 새 성벽을 헐었으니, 아테네인들이 그들이 반란을 꾀한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에 앞서 그들은 아테네인에게서 서약을 받아, 앞으로도 전과 같이 자기들을 대하리라는 보장을 될 수 있는 데까지 얻어 두었다. 그렇게 겨울이 끝났고, 투키디데스가 그 역사를 기록한 이 전쟁의 일곱째 해도 그와 함께 끝났다.

이듬해 여름 첫 며칠 사이에 초승달 무렵 일식이 있었고, 같은 달 초에는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는 동안 미틸레네와 그 밖의 레스보스 망명자들이 대부분 대륙에서 출발해, 펠로폰네소스에서 고용한 용병과 현지에서 모은 병력을 데리고 로이테이온을 빼앗았다가 포카이아 스타테르4 2,000을 받고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채 돌려주었다. 그 뒤 그들은 안탄드로스로 진군해 배신으로 그 도시를 손에 넣었으니, 그들의 계획은 전에 미틸레네의 것이었으나 지금은 아테네인이 쥐고 있는 안탄드로스와 그 밖의 악타이아 도시들을 해방하는 것이었다. 그곳에 요새를 마련하기만 하면 이다산이 가까워 목재가 넉넉한 덕에 배를 짓는 데 온갖 편의를 누리고 그 밖의 물자도 풍족히 얻을 수 있었으며, 이 근거지에서 멀지 않은 레스보스를 손쉽게 짓밟고 대륙의 아이올리스 도시들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망명자들의 계획이 이러한 가운데, 아테네인들은 같은 여름에 함선 60척과 중장보병 2,000명과 약간의 기병, 그리고 밀레토스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온 동맹 병력을 이끌고 키테라를 치러 나섰으며, 지휘는 니케라토스의 아들 니키아스와 디오트레페스의 아들 니코스트라토스와 톨마이오스의 아들 아우토클레스가 맡았다. 키테라는 말레아 맞은편 라코니아 앞바다에 놓인 섬이다. 주민은 페리오이코이5 계층에 속하는 스파르타 사람들이며, 키테라 판관이라 불리는 관리가 해마다 스파르타에서 그곳으로 건너갔다. 중장보병 수비대도 정기적으로 그곳에 보냈고 그 섬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니, 이집트와 리비아에서 오는 상선이 닿는 곳이었고 동시에 바다에서 오는 사략선의 공격으로부터 라코니아를 지켜 주었기 때문이다. 라코니아의 해안 전체가 시칠리아 바다와 크레타 바다 쪽으로 가파르게 솟아 있어 그곳이 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었던 것이다.

아테네인들은 원정군을 이끌고 이곳에 배를 대어, 함선 10척과 밀레토스 중장보병 2,000명으로 바닷가의 도시 스칸데이아를 빼앗았고, 나머지 병력으로는 말레아를 바라보는 쪽 섬 기슭에 올라 키테라의 아랫도시를 치러 갔는데 그곳에는 주민이 모두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싸움이 벌어지자 키테라인들은 얼마간 버티다가 돌아서서 윗도시로 달아났고, 오래지 않아 그곳에서 니키아스와 그 동료들에게 항복했는데 목숨만은 보장받고 제 운명은 아테네인의 결정에 맡긴다는 조건이었다. 그에 앞서 니키아스와 주민 몇 사람 사이에 연락이 오가고 있었는데, 그 덕에 항복이 더 빨리 이루어졌고 키테라인들에게 당장으로나 앞날로나 더 유리한 조건이 붙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스파르타 사람이라는 것과 그들의 섬이 라코니아에 아주 가깝다는 것 때문에 아테네인들에게 쫓겨났을 것이다. 항복이 이루어진 뒤 아테네인들은 항구 가까이의 도시 스칸데이아를 차지하고 키테라에 수비대를 둔 다음, 아시네와 헬로스를 비롯해 바닷가의 대부분의 고장으로 배를 몰아 상륙하고 편한 자리에서 밤을 뭍에서 지내며 이레쯤 그 땅을 계속 짓밟았다.

스파르타인들은 아테네인들이 키테라의 주인이 된 것을 보고 자기 해안에도 그런 상륙이 있으리라 내다보았으나 어디서도 병력을 모아 맞서지 않았고, 위협받는 지점이 요구한다고 보이는 만큼의 중장보병으로 이루어진 수비대를 나라 곳곳에 여기저기 보냈으며 대체로 지키는 쪽에 크게 치우쳐 있었다. 그 섬에서 당한 혹독하고 뜻밖의 타격과 필로스와 키테라를 빼앗긴 일, 그리고 대비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전쟁이 사방에서 나타난 일을 겪고 나서 그들은 내부의 반란을 끊임없이 두려워하며 살았고, 이제 기병 400명과 궁수 부대를 새로 갖추는 보기 드문 조치를 취했으며 군사에 관한 일에서 어느 때보다 소심해졌다. 자기들의 체제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바다의 싸움에 휘말렸음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그 상대가 시도해 보지 않은 일은 언제나 놓쳐 버린 성공으로 여기는 아테네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최근에 아무 까닭도 없이 잇따라 닥친 숱한 불운이 그들의 기운을 완전히 꺾어 놓아, 그들은 섬에서 겪은 것과 같은 두 번째 재앙을 늘 두려워했고 그래서 싸움터에 나설 엄두를 거의 내지 못했으며 움직이기만 하면 실수를 저지르리라고 여겼으니, 역경을 겪어 본 적이 없던 터라 자기들에 대한 믿음을 모두 잃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아무 움직임도 없이 아테네인들이 자기 해안을 짓밟도록 내버려 두었으니, 상륙이 이루어진 곳 가까이에 있던 수비대들은 언제나 제 수가 모자란다고 여겼고 전체에 퍼진 그 마음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코티르타와 아프로디시아 가까이에서 감히 맞선 수비대가 하나 있어 흩어져 있던 경보병 무리를 돌격으로 겁에 질리게 했으나, 중장보병이 맞받아 나오자 몇 사람과 얼마간의 무구를 잃고 물러났으며, 아테네인들은 그 일로 전승 기념물을 세우고 키테라로 배를 돌렸다. 그곳에서 그들은 에피다우로스 리메라로 돌아가 그 땅의 일부를 짓밟고, 아르고스와 라코니아의 경계에 있는 키누리아 땅의 티레아에 이르렀다. 이 지구는 그 주인인 스파르타인이 쫓겨난 아이기나인에게 살라고 내준 곳이었으니, 지진이 일어나고 헬롯이 들고일어났을 때 그들이 베푼 도움에 보답한 것이었고, 또한 그들이 아테네에 딸린 처지이면서도 늘 스파르타 편에 섰기 때문이었다.

아테네인들이 아직 바다에 있는 동안 아이기나인은 해안에 쌓고 있던 요새를 버리고 자기들이 살던 윗도시로 물러났는데, 그곳은 바다에서 1마일이 조금 넘게 떨어져 있었다. 그 일을 돕고 있던 스파르타의 지구 수비대 가운데 하나는 아이기나인이 간청했는데도 함께 그곳에 들어가기를 거절했으니 성벽 안에 갇히는 것이 위험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높은 땅으로 물러나 가만히 있었으니 자기들이 적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아테네인들은 상륙하여 곧바로 전 병력으로 나아가 티레아를 빼앗았다. 그들은 도시를 불태우고 그 안에 있던 것을 털었으며, 싸움에서 죽지 않은 아이기나인들을 아테네로 데려갔고 상처를 입고 포로가 된 그들의 스파르타인 지휘관 파트로클레스의 아들 탄탈로스도 함께 데려갔다. 그들은 또한 옮겨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여긴 키테라 사람 몇도 데려갔다. 아테네인들은 이들을 섬들에 두기로 정했고, 나머지 키테라인은 제 땅을 그대로 갖되 공납으로 4탈란톤6을 내기로 했으며, 붙잡힌 아이기나인은 오래되고 뿌리 깊은 원한 때문에 모두 죽이고, 탄탈로스는 섬에서 잡힌 스파르타인들과 함께 가두기로 했다.

같은 여름에 시칠리아의 카마리나와 겔라 사람들이 먼저 서로 휴전을 맺었고, 그 뒤 다른 모든 시칠리아 도시의 사절단이 화평을 이루어 보려고 겔라에 모였다. 불평하는 여러 편이 저마다 지닌 원한과 주장에 따라 이쪽저쪽에서 많은 의견이 나온 뒤, 그들 가운데 가장 힘 있는 사람인 시라쿠사 사람 헤르몬의 아들 헤르모크라테스가 모인 자리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칠리아인 여러분, 제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말하는 것은 제 도시가 시칠리아에서 가장 작아서도 아니고 이 전쟁으로 가장 크게 고통받아서도 아니며, 이 섬 전체에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제게 보이는 것을 공공연히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쟁이 악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너무나 익숙한 명제여서 이를 길게 펼치는 일은 지루할 것입니다. 전쟁에서 얻을 것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몰라서 억지로 전쟁에 들어서는 일도 없고 두려움 때문에 전쟁 밖에 머무는 일도 없습니다. 앞의 사람에게는 이익이 위험보다 커 보이고, 뒤의 사람은 당장의 희생을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위험을 무릅쓰려 합니다. 그러나 둘 다 마침 그렇게 움직일 때를 잘못 골랐다면 평화를 맺으라는 권고가 쓸모없지는 않을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보기만 한다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지금 이 고비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전쟁에 나선 것은 저마다 제 이익을 위해서였고, 지금 우리가 같은 이익을 앞에 놓고 어떻게 평화를 맺을 수 있을지 논하고 있으며, 우리가 제 권리라고 여기는 것을 얻지 못한 채 흩어진다면 다시 전쟁을 하게 되리라는 것, 이 점을 두고 다툴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이 회의에 걸려 있는 것이 우리 각자의 이익만이 아님을 보아야 합니다. 시칠리아를 구할 시간이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가 하는 물음도 걸려 있으며, 제가 보기에 시칠리아 전체가 아테네의 야심에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리스에서 으뜸가는 세력이 지금 우리 바다에 두고 있는 몇 척 안 되는 함선으로 우리의 실책을 지켜보며 동맹이라는 그럴듯한 이름 아래 우리 사이에 본디 있는 적의를 제 이익으로 돌리려 꾀하고 있음을 볼 때, 우리는 그 이름 하나에서 제가 내놓을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절박한 평화의 논거를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전쟁을 벌이고, 부르지 않은 곳에도 기꺼이 제 무기를 들고 가는 민족을 불러들여 우리를 돕게 하며, 제 비용으로 스스로를 해치면서 동시에 그들의 지배를 앞장서 여는 길잡이 노릇을 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우리가 지쳐 버린 것을 보고서 언젠가 더 큰 원정군을 이끌고 와 우리 모두를 예속시키려 들리라고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동맹을 불러들이고 위험을 자초하는 일은 저마다의 나라를 새로 얻은 것으로 넉넉하게 하기 위함이어야지 이미 가진 것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공동체를 그토록 치명적으로 해치는 내부의 불화가, 이 섬에 사는 우리가 제 동네 싸움에 빠져 공동의 적을 소홀히 한다면 시칠리아에도 똑같이 치명적이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고려가 사람과 사람을, 도시와 도시를 화해시켜야 하며 시칠리아 전체를 구하려는 공동의 노력으로 우리를 하나로 묶어야 합니다. 도리스인만이 아테네의 적이고 칼키디케 종족은 이오니아의 피 덕에 안전하다고 여길 사람도 없어야 합니다. 문제의 그 공격은 두 겨레 가운데 하나를 미워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동 재산인 시칠리아의 좋은 것들을 탐내서 나온 것입니다. 칼키디케의 청을 아테네인이 받아들인 일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들에게 어떤 도움도 준 적 없는 동맹이 조약이 보장하는 것보다 거의 더 많은 것을 그들에게서 단번에 받았습니다. 아테네인이 이런 야심을 품고 이런 방책을 쓰는 것은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니며, 저는 지배하려는 자들을 탓하지 않고 섬기기를 지나치게 서두르는 자들을 탓합니다. 자기에게 굽히는 자를 지배하는 것도 자기를 괴롭히는 자에게 맞서는 것도 똑같이 사람의 본성에 속하며, 어느 쪽도 다른 쪽에 못지않게 한결같습니다. 한편 이런 위험을 보면서도 제대로 대비하기를 거부하는 자들, 또는 공동의 위험을 없애기 위해 뭉치는 것이 우리의 첫째 의무라고 마음을 정하지 않은 채 이 자리에 온 자들은 모두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없애는 가장 빠른 길은 서로 평화를 맺는 것입니다. 아테네인은 제 나라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리로 부른 자들의 나라에서 위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전쟁이 전쟁을 낳는 대신 평화가 조용히 우리의 다툼을 끝낼 것이며, 그럴듯한 구실을 내세우고 나쁜 목적으로 이곳에 온 손님들은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떠날 충분한 이유를 갖게 될 것입니다.

아테네인에 관한 한, 지혜로운 방책에 본디 들어 있음이 증명된 큰 이점이 이러합니다. 그것과 별개로, 평화가 축복 가운데 으뜸이라는 데에 모두가 뜻을 같이하는 마당에 우리가 어찌 우리끼리 평화를 맺기를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좋은 것과 여러분이 호소하는 나쁜 것이 전쟁보다 평온함으로 더 잘 지켜지고 더 잘 고쳐지리라고, 또 평화에도 덜 위태로운 종류의 영예와 빛남이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길게 늘어놓을 수 있는 수많은 다른 축복과, 그에 못지않게 수많은 전쟁의 비참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고려는 여러분에게 제 말을 흘려듣지 말고 오히려 그 안에서 저마다 제 안전을 찾으라고 가르쳐 줄 것입니다. 여기 있는 이들 가운데 정의로든 힘으로든 제 목적을 반드시 이루리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뜻밖의 말이 그에게 너무 심한 실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잘못한 자를 벌하려 했다가 원수를 벌하지도 못하고 제 몸조차 건지지 못했으며, 이익을 얻으려 힘을 믿었던 많은 사람이 더 얻기는커녕 가진 것을 잃을 운명에 처했음을 그는 기억해야 합니다. 잘못이 저질러졌다고 해서 복수가 반드시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만만하다고 해서 힘이 확실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앞날에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요소가 가장 널리 힘을 미치며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이지만, 실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쓸모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똑같이 두렵게 하여 서로를 치기 전에 생각해 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알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아테네인이 눈앞에 있다는 당장의 공포가 제 본래의 인상을 남기도록 두고, 우리가 저마다 그려 두었을 계획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이 장애들로 충분히 설명된다고 여기고, 이 나라에서 침입자를 돌려보냅시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영원한 평화가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될 수 있는 한 긴 기간의 조약을 맺고 우리끼리의 다툼은 다른 날로 미룹시다. 요컨대 제 권고를 받아들이면 우리는 저마다 자유로운 나라의 시민으로 남아 제 운명을 스스로 판가름하며 선의든 악의든 똑같은 힘으로 갚을 수 있게 되지만, 이를 물리치면 우리는 남에게 매인 처지가 되어 모욕 하나 물리칠 힘도 없게 되고 가장 좋게 보아도 우리의 가장 지독한 원수와 벗이 되고 본디 벗이어야 할 이들과 원수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로 말하자면, 처음에 말했듯이 큰 도시를 대표하는 사람이고 제 몸을 지키는 일보다 남을 치는 일을 생각할 수 있는 처지이지만, 이런 위험을 내다보고 무언가를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원수를 해치자고 저 자신을 무너뜨릴 뜻이 없으며, 제 계획과 마찬가지로 제가 어쩔 수 없는 운까지도 제가 주인이라고 여길 만큼 적의에 눈이 멀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이치에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나머지도 적에게 떠밀려서가 아니라 제 뜻으로 제가 하는 대로 따라 주시기를 청합니다. 같은 핏줄끼리 서로 양보하는 데에는 아무 수치도 없으니, 도리스인이 도리스인에게, 칼키디케 사람이 제 형제에게 양보하는 일이 그러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이웃이고 같은 땅에 살며 같은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시칠리아인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때가 오면 우리는 다시 전쟁을 하게 될 것이고 앞으로 열릴 회의를 통해 다시 우리끼리 평화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혜롭다면 바깥에서 온 침입자는 언제나 우리가 한데 뭉쳐 맞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하나가 다치는 것은 모두의 위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이 섬에 동맹도 중재자도 결코 불러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시칠리아에 두 가지 도움을 한꺼번에 주어 아테네인과 내전에서 단번에 벗어나게 하고, 앞으로는 제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며 바깥에서 오는 위협을 덜 받게 될 것입니다.

헤르모크라테스의 말은 이러했다. 시칠리아인들은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저마다 가진 것을 그대로 갖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기로 서로 뜻을 모았는데, 카마리나인은 시라쿠사인에게 치르기로 정해진 값을 내고 모르간티나를 갖기로 했다. 그리고 아테네의 동맹들은 지휘를 맡은 장교들을 불러 자기들이 평화를 맺을 것이며 그 조약에 그들도 포함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군들이 동의하자 평화가 맺어졌고, 그 뒤 아테네 함대는 시칠리아에서 떠나갔다. 그들이 아테네에 이르자 아테네인들은 피토도로스와 소포클레스를 추방하고 에우리메돈에게는 벌금을 물렸으니, 시칠리아를 굴복시킬 수 있었는데도 뇌물을 받고 떠났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번영이 시민들을 그토록 철저히 설득해 놓았던 것이니, 아무것도 자기들을 막아설 수 없고 가능한 일이든 될 수 없는 일이든 똑같이 이룰 수 있으며 수단이 넉넉하든 모자라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믿게 했던 것이다. 그 까닭은 전반적으로 남다른 성공을 거두어 온 데 있었으니,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제 힘과 제 희망을 뒤섞게 만들었다.

같은 여름에 메가라 시내에 있던 메가라인들은, 해마다 두 번씩 전 병력으로 자기 땅을 쳐들어오는 아테네인들의 적대 행위에 시달리고 내란 때 민중파에게 쫓겨나 페가이에 나가 있던 자기네 망명자들의 습격에 부대끼면서, 망명자들을 도로 받아들여 도시를 두 재앙 가운데 하나에서 풀어 주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서로 묻기 시작했다. 망명자들의 벗들은 이 동요를 알아채고 전보다 더 드러내 놓고 이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민중파의 지도자들은 그 시절의 고통이 자기들을 떠받치던 자들의 한결같음을 지치게 했음을 보고 놀라, 아테네 장군들인 아리프론의 아들 히포크라테스와 알키스테네스의 아들 데모스테네스와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으며 도시를 넘기기로 마음먹었으니, 자기들이 추방한 당파가 돌아오는 것보다 그편이 자기들에게 덜 위험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짜였다. 아테네인들이 먼저 도시에서 니사이아 항구까지 1마일 가까이 뻗은 긴 성벽을 빼앗아 니사이아에 있는 펠로폰네소스인들이 구원하러 오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었으니, 그곳의 펠로폰네소스인들은 메가라의 충성을 붙들어 두는 유일한 수비대였다. 그다음에 윗도시를 아테네인의 손에 넘기려 해 본다는 것이었고, 그때가 되면 윗도시가 더 쉽게 넘어오리라고 여겨졌다.

아테네인들은 자기들과 연락을 주고받던 자들 사이에 말과 행동을 두고 계획이 다 짜인 뒤, 히포크라테스의 지휘 아래 중장보병 600명을 이끌고 밤에 메가라 앞바다의 섬 미노아로 배를 몰아 멀지 않은 채석장에 자리를 잡았으니, 그곳은 성벽에 쓸 벽돌을 캐내던 데였다. 한편 또 한 사람의 지휘관 데모스테네스는 플라타이아 경보병 한 부대와 페리폴로이7 한 부대를 데리고 그보다 더 가까운 에니알리오스 신역에 매복했다. 그날 밤 알아야 할 일을 맡은 자들 말고는 아무도 이를 알지 못했다. 날이 밝기 조금 전에 메가라 안의 배신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성문을 열 구실을 마련해 두려고 오래전부터 밤마다 노략질을 핑계 삼아, 지휘를 맡은 장교의 허락을 받고 작은 노 젓는 배를 수레에 싣고 해자를 따라 밤에 바다까지 옮겨 타고 나갔다가 날이 밝기 전에 다시 수레에 실어 성문을 지나 성벽 안으로 들여오곤 했는데, 그들이 내세운 구실은 항구에 배가 한 척도 보이지 않게 하여 미노아에 자리 잡은 아테네인의 봉쇄를 헛수고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수레는 이미 성문에 와 있었고 배를 들이려고 여느 때처럼 문이 열려 있었는데, 이 일을 함께 짜 두었던 아테네인들이 그것을 보고 문이 다시 닫히기 전에, 또 수레가 아직 거기 있어 문을 닫지 못하는 동안에 이르려고 매복한 자리에서 온 힘을 다해 달려 나왔다. 바로 그 순간 그들과 한패인 메가라인들은 성문을 지키던 자들을 죽였다. 가장 먼저 뛰어든 것은 제 플라타이아인들과 페리폴로이를 이끈 데모스테네스였으니, 지금 전승 기념물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였다. 그가 성문 안에 들어서자마자 플라타이아인들은 놀라 구원하러 달려온 가장 가까운 펠로폰네소스인 무리와 맞붙어 이겼고, 다가오는 아테네 중장보병을 위해 성문을 확보했다.

그다음에는 아테네인들이 들어오는 대로 저마다 성벽을 치러 갔다. 펠로폰네소스 수비대 가운데 몇몇은 처음에 제자리를 지키며 공격을 물리치려 했고 그 가운데 몇이 죽었으나, 본대는 겁을 먹고 달아났으니 밤의 기습과 메가라의 배신자들이 무장하고 자기들에게 맞서는 광경이 그들로 하여금 메가라 전체가 적에게 넘어갔다고 여기게 했던 것이다. 마침 아테네의 전령이 제 생각으로 목소리를 높여 메가라인 가운데 원하는 자는 누구든 아테네 대열에 들어오라고 외치기까지 했다. 수비대는 이 말을 듣자마자 무너져, 자기들이 미리 짜인 공격에 걸려들었다고 믿고 니사이아로 피했다. 날이 밝을 무렵 성벽은 이미 빼앗겼고 도시 안의 메가라인들은 크게 술렁였는데, 아테네인들과 교섭했던 자들이 그 음모를 알고 있던 나머지 민중파의 뒷받침을 받아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 사이에 미리 짜인 것은, 성문이 열리는 순간 아테네인들이 밀고 들어오고 음모에 가담한 자들은 몸에 기름을 발라 나머지와 구별되어 다치는 일을 면한다는 것이었다. 성문을 여는 일은 그만큼 더 안전했으니, 엘레우시스에서 온 아테네 중장보병 4,000명과 기병 600명이 약속대로 밤새 행군해 이제 가까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음모에 가담한 자들이 모두 기름을 바르고 성문 곁 제자리에 서 있을 때, 그들과 한패이던 자 하나가 그 음모를 반대편에 일러바쳤다. 반대편은 한데 모여 떼를 지어 와서는, 나가서 싸워서는 안 되며(지금보다 병력이 더 많았을 때에도 한 번도 감히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도시의 안전을 함부로 위태롭게 해서도 안 된다고, 자기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싸움을 메가라 안에서 치르게 될 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 밖에는 음모를 알고 있다는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은 채 제 권고가 가장 낫다고 굳게 우겼고, 그러면서 곁에 바싹 붙어 성문을 지켜보아 음모에 가담한 자들이 제 뜻을 이룰 수 없게 만들었다.

아테네 장군들은 무언가 장애가 생겼고 힘으로 도시를 빼앗는 일이 더는 될 수 없음을 보고 곧바로 니사이아를 에워싸는 일에 들어갔으니, 구원이 오기 전에 그곳을 빼앗을 수 있다면 메가라의 항복도 곧 뒤따르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쇠붙이와 석공과 그 밖에 필요한 모든 것이 아테네에서 빠르게 올라왔으므로, 아테네인들은 자기들이 차지한 성벽에서 시작해 그 지점에서 메가라를 바라보는 가로 성벽을 니사이아 양옆으로 바다까지 쌓았다. 해자와 성벽은 군대가 나누어 맡았고 돌과 벽돌은 변두리에서 가져왔으며, 과일나무와 재목은 필요해 보이는 곳마다 목책을 세우려고 베어 냈고, 변두리의 집들도 때로 흉벽을 덧붙여 그 방벽의 일부로 들어갔다. 이날 하루 내내 일이 이어졌고 이튿날 오후에는 성벽이 거의 다 되었는데, 그때 니사이아의 수비대는 먹을 것이 아주 바닥난 데 놀랐으니 그들은 날마다 윗도시에서 그날 먹을 것을 받아 오던 터였다. 펠로폰네소스인에게서 빠른 구원이 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고 메가라가 적대적이라고 여긴 그들은 무기를 내놓고 저마다 정해진 액수의 몸값을 치른다는 조건으로 아테네인에게 항복했으며, 그들의 스파르타인 지휘관과 그곳에 있던 그의 같은 나라 사람들은 아테네인의 처분에 맡겨졌다. 이 조건으로 그들은 항복하고 나왔고, 아테네인들은 긴 성벽이 메가라와 이어지는 지점에서 그것을 허물고 니사이아를 차지한 뒤 다른 준비를 이어 갔다.

바로 이 무렵 스파르타인 텔리스의 아들 브라시다스가 마침 시키온과 코린트 근처에 있으면서 트라키아로 보낼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성벽이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니사이아에 있는 펠로폰네소스인들과 메가라의 안전이 걱정되어, 보이오티아인들에게 사람을 보내 게라네이아 산 아래 메가라 땅에 있는 트리포디스코스라는 마을에서 되도록 빨리 만나자고 했고, 자신은 코린트 중장보병 2,700명과 플리우스인 400명과 시키온인 600명, 그리고 이미 모아 둔 제 병력을 이끌고 갔으니 니사이아가 아직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여긴 것이었다. 그곳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그는 밤에 트리포디스코스로 행군해 나와 있었다) 그는 자기가 온 것이 알려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군대에서 뽑은 300명을 데리고, 바닷가에 내려가 있던 아테네인들의 눈에 띄지 않은 채 메가라로 올라갔다. 겉으로 내세운 목적은, 그리고 될 수만 있다면 실제 목적도 니사이아를 쳐 보는 것이었으나 무엇보다도 메가라 안으로 들어가 그 도시를 붙들어 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니사이아를 되찾을 가망이 있다고 말하면서 도시 사람들에게 제 무리를 들여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메가라의 두 당파 가운데 한쪽인 민중파는 그가 자기들을 쫓아내고 망명자들을 도로 들여앉힐까 두려워했고, 다른 한쪽인 망명자들의 벗들은 바로 그 위험을 걱정한 민중파가 자기들에게 달려들어 도시가 성문 안의 싸움으로 무너지고 그것을 매복한 아테네인들이 지켜보게 될까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그는 들어오기를 거절당했고 두 당파는 다 가만히 있으면서 일이 어떻게 되는지 기다리기로 했으니, 저마다 아테네인들과 구원군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리라 내다보았고 제 편이 이기는 것을 보고 나서 그 편을 드는 쪽이 더 안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뜻을 이루지 못한 브라시다스는 나머지 군대로 돌아갔다. 날이 밝자 보이오티아인들이 그와 합류했다. 그들은 브라시다스에게서 기별을 받기도 전에 메가라의 위험을 자기들의 위험으로 여겨 그곳을 구원하기로 마음먹고 이미 총동원 병력으로 플라타이아에 나와 있었는데, 그때 그의 전령이 이르러 그 결심에 박차를 더했다. 그들은 곧바로 중장보병 2,200명과 기병 600명을 그에게 보냈고 본대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모인 군대 전체는 중장보병 6,000명이었다. 아테네 중장보병은 니사이아와 바다 곁에 대형을 짜고 있었으나, 들판에 흩어져 있던 경보병은 보이오티아 기병의 공격을 받아 바다까지 몰렸으니 전혀 뜻밖에 당한 것이었다. 앞서 여러 번 메가라인에게는 어느 쪽에서도 구원이 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번에는 보이오티아인들이 아테네 기병의 돌격을 받아 맞붙었고, 오래 이어진 기병전이 벌어졌는데 양쪽 다 이겼다고 주장했다. 아테네인들은 니사이아 바로 앞까지 돌격해 온 보이오티아 기병의 지휘자와 그 동료 몇을 죽여 무구를 벗겼고, 그 주검을 차지한 채 휴전 아래 돌려주고 전승 기념물을 세웠다. 그러나 싸움 전체를 보면 어느 쪽도 결정적인 이점을 얻지 못한 채 병력이 갈라섰으니, 보이오티아인들은 제 군대로, 아테네인들은 니사이아로 돌아갔다.

그 뒤 브라시다스와 그 군대는 바다와 메가라에 더 가까이 다가가 편한 자리를 잡고 전투 대형을 갖춘 채 가만히 있었으니, 아테네인들이 쳐 오리라 여겼고 메가라인들이 어느 쪽이 이기는지 보려고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태도에는 두 가지 이점이 있어 보였다. 먼저 치고 나가지도 않고 스스로 싸움의 위험을 불러들이지도 않으면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니, 그리하여 그날의 짐을 지지 않고도 그날의 영예를 당당히 거두는 셈이었고 동시에 메가라에서 제 이익을 제대로 챙기는 것이었다.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고 반드시 패한 쪽으로 여겨져 그 도시를 잃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아테네인들이 그 도전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을 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싸우지 않고도 목적이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리고 일은 그렇게 되었다. 아테네인들은 긴 성벽 바깥에 대형을 짰고, 적이 치고 나오지 않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니 그들의 장군들이 위험을 지는 몫이 너무 고르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로 그들의 목적은 대부분 이미 이루어져 있었고, 싸움을 시작한다면 수가 더 많은 적을 상대해야 했으며, 이긴다 해도 얻는 것은 메가라뿐인데 지면 중장보병의 정수가 무너질 판이었다. 적에게는 사정이 달랐으니, 그의 군대에 실제로 참가한 나라들조차 저마다 제 전 병력의 일부만을 걸고 있었으므로 그는 얼마든지 더 대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쪽도 치고 나가지 않은 채 얼마 동안 기다린 뒤에 아테네인들은 니사이아로 물러났고, 펠로폰네소스인들도 그 뒤를 따라 자기들이 떠나왔던 자리로 물러났다. 이제 메가라 망명자들의 벗들은 망설임을 버리고 브라시다스와 여러 나라에서 온 지휘관들에게 성문을 열어 주었으니, 그를 이긴 자로 보고 아테네인들은 싸움을 마다한 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을 도시 안으로 맞아들인 뒤 함께 일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아테네인들과 연락을 주고받던 당파는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손발이 묶였다.

그 뒤 브라시다스는 동맹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코린트로 돌아가, 처음부터 가려던 목적지인 트라키아 원정을 준비했다. 아테네인들도 본국으로 돌아가자, 아테네와의 교섭에 가장 깊이 얽혀 있던 도시 안의 메가라인들은 자기들이 들통났음을 알고 오래지 않아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자들은 망명자들의 벗들과 의논하여 페가이에 있던 당파를 도로 불러들였는데, 지난 일로 복수하지 않고 오직 도시의 참된 이익만을 살피겠다는 엄숙한 맹세로 그들을 묶은 뒤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중장보병의 사열을 열고 부대를 갈라 세워, 제 원수들과 아테네인들과의 연락에 가장 깊이 얽혔다고 여겨진 자들 가운데 100명쯤을 골라내어 민중 앞에 세웠고, 표를 드러내 놓고 던지게 하여 그들을 유죄로 몰아 죽였으며 도시에 굳게 닫힌 과두정을 세웠다. 아주 적은 수의 당파 사람들이 이룬 일이었는데도 그 변혁은 매우 오래갔다.

주

  1. 1. 약 1.5마일 — 크롤리가 원문의 스타디온을 영국식 단위로 옮긴 것이다. 이 번역은 크롤리의 영역본을 저본으로 삼았으므로 그 표기를 따랐다. 이 장의 다른 거리 표기도 모두 같다.

  2. 2. 파이안 — 신에게 바치는 노래. 그리스인은 싸움에 들어가기 직전이나 승리를 기릴 때 이 노래를 함께 불렀다.

  3. 3. 소포클레스 — 아테네 장군으로, 같은 이름의 비극 작가와는 다른 사람이다.

  4. 4. 스타테르 — 그리스의 은화 단위. 도시마다 무게와 값이 달랐다. 현대 화폐로 환산하지 않는다.

  5. 5. 페리오이코이 — 스파르타 주변의 자유민. 스파르타에 딸린 도시에 살며 군역을 졌으나 완전시민권은 없었다.

  6. 6. 탈란톤 — 그리스의 무게 단위이자 화폐 단위. 1탈란톤은 6,000드라크메에 해당했다. 현대 화폐로 환산하지 않는다.

  7. 7. 페리폴로이 — 아테네의 국경 수비 부대. 젊은 시민들이 복무하며 아티카의 변경과 요새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