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질라는 앞장서서 계단을 올라가며 촛불을 가리고 소리를 내지 말라고 일렀는데, 주인이 나를 재우려는 그 방을 두고 별난 생각을 품고 있어서 누구든 그 방에서 묵는 것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까닭을 묻자 질라는 모른다고 대답하면서, 이 집에 산 지 겨우 한두 해밖에 안 되었고 워낙 괴상한 일이 많이 벌어지는 집이라 하나하나 궁금해하기 시작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 역시 너무 멍해서 궁금해할 기운도 없었으므로, 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가 어디 있나 둘러보았다. 세간이라고는 의자 하나, 옷장 하나, 그리고 위쪽에 마차 창처럼 네모난 구멍을 뚫어 놓은 커다란 참나무 상자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 물건에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니, 식구마다 방을 하나씩 따로 가질 필요가 없게끔 아주 요령 있게 짜 놓은 별난 옛날식 침상이었다. 사실 그것은 작은 벽장 꼴을 하고 있었고, 그 안에 감싸인 창턱이 탁자 노릇을 했다.
나는 판자를 댄 옆문을 밀어 열고 촛불을 든 채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다시 닫았고, 그러자 히스클리프의 감시로부터도, 다른 누구의 눈길로부터도 안전해진 느낌이 들었다.
촛불을 놓은 창턱 한구석에는 곰팡이 슨 책이 몇 권 쌓여 있었고, 창턱의 칠 위에는 글씨가 빼곡하게 긁혀 있었다. 그런데 그 글씨는 크고 작은 온갖 글꼴로 되풀이해 쓴 이름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캐서린 언쇼, 군데군데 캐서린 히스클리프로 바뀌었다가 다시 캐서린 린턴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멍하니 맥이 빠진 채 창에 머리를 기대고 캐서린 언쇼, 히스클리프, 린턴을 한 자 한 자 되풀이해 읽다가 눈이 감겼다. 그런데 눈을 붙인 지 5분도 안 되어 어둠 속에서 흰 글자들이 유령처럼 생생하게 번쩍 튀어나왔고, 허공에 캐서린들이 우글거렸다. 나는 끈덕지게 달라붙는 그 이름을 떨쳐 내려고 정신을 차렸는데, 보니 촛불 심지가 옛 책 한 권 위에 쓰러져 송아지 가죽 타는 냄새를 온 방에 풍기고 있었다.
나는 심지를 잘라 끄고, 추위와 가시지 않는 메스꺼움 때문에 몹시 불편한 몸을 일으켜 앉아 그을린 책을 무릎에 펼쳤다. 가는 활자로 찍은 신약 성경이었고 지독한 곰팡내가 났는데, 면지에는 '캐서린 언쇼의 책'이라는 글귀와, 스물다섯 해쯤 전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책을 덮고 다른 책을, 또 다른 책을 집어 들어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살펴보았다. 이 캐서린이라는 사람의 장서는 골라 모은 것이었고, 낡아 해진 꼴로 보아 꽤나 손을 탄 것이 분명했다. 다만 늘 본디 쓰임새대로 쓰인 것은 아니었다. 펜과 잉크로 단 주석, 적어도 주석처럼 보이는 글이 인쇄공이 남겨 둔 빈자리를 한 조각도 남김없이 덮고 있어서, 그것을 피한 장은 거의 하나도 없었다. 따로 떨어진 문장도 있었지만, 다른 곳은 아직 덜 여문 어린아이의 글씨로 휘갈겨 쓴 어엿한 일기 꼴을 하고 있었다. 덧붙은 빈 쪽 맨 위에는(처음 그 빈 쪽을 찾아냈을 때는 아마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으리라) 내 친구 조지프를 그린 훌륭한 풍자화가 하나 있었는데, 거칠지만 힘차게 그린 그림이어서 나는 크게 즐거웠다. 이름 모를 캐서린에게 당장 흥미가 일어서, 나는 곧바로 그 빛바랜 상형 문자를 풀어 읽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일요일." 그림 아래 단락은 이렇게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셨으면 좋겠다. 힌들리는 아버지 대신으로는 정말 밉살스럽다. 히스클리프한테 하는 짓이 끔찍하다. H와 나는 반란을 일으킬 작정이고, 오늘 저녁 그 첫걸음을 내디뎠다.
"온종일 비가 퍼부어서 교회에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지프가 기어이 다락방에 신도를 모아 예배를 보겠다고 나섰다. 힌들리와 그 아내가 아래층 아늑한 난롯가에서 볕 쬐듯 늘어져 있는 동안(성경 읽는 것 말고는 무슨 짓이든 하고 있었을 거라고 내가 장담한다), 히스클리프와 나와 그 불쌍한 쟁기질 소년은 기도서를 들고 올라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는 곡식 자루 위에 나란히 앉아 끙끙대고 덜덜 떨면서, 조지프도 떨기를 바랐다. 그러면 자기 몸을 위해서라도 설교를 짧게 해 줄 테니까. 헛된 생각이었다! 예배는 꼭 세 시간이나 걸렸다. 그런데도 우리가 내려오는 것을 보자 오빠는 뻔뻔하게도 '뭐야, 벌써 끝났어?' 하고 소리쳤다. 일요일 저녁이면 시끄럽게만 굴지 않으면 놀아도 괜찮았는데, 이제는 키득거리기만 해도 구석으로 쫓겨난다.
"'너희가 여기 주인이 있다는 걸 잊었나 보지.' 폭군이 말한다. '누구든 내 비위를 건드리는 놈은 맨 먼저 박살을 내 주겠어! 다들 얌전히 입 다물고 있어. 야, 이 녀석! 방금 너였지? 프랜시스, 여보, 지나가는 길에 저놈 머리끄덩이 좀 잡아당겨.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났어.' 프랜시스는 히스클리프의 머리를 힘껏 잡아당기더니 남편 무릎에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둘이서 아기 둘처럼 몇 시간이고 입을 맞추고 시시한 소리를 지껄였는데, 우리라면 부끄러워서 못 할 바보 같은 수다였다. 우리는 형편이 허락하는 만큼 찬장 밑 아치 안에 아늑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내가 우리 앞치마 두 장을 이어 붙여 커튼 삼아 막 걸어 놓았을 때, 마구간에 볼일을 보러 갔던 조지프가 들어온다. 조지프는 내 솜씨를 찢어 내리고 내 따귀를 때리더니 까마귀처럼 꺽꺽거린다.
"'쥔 어른을 묻은 지 얼마나 됐다고, 안식일도 아직 안 끝났고 복음 소리가 아직 귀에 쟁쟁할 텐데 감히 장난질이여! 부끄러운 줄 알아라! 앉아, 이 못된 것들! 읽기만 하면 좋은 책은 쌔고 쌨으니 앉아서 네 영혼이나 생각해라!'
"그러면서 조지프는 우리를 억지로 똑바로 고쳐 앉혀서, 멀리 있는 불에서 흐릿한 빛줄기라도 받아 그가 떠안긴 잡동사니 책의 글자를 볼 수 있게 했다. 나는 그 일을 견딜 수가 없었다. 꾀죄죄한 책의 등을 잡아 개집에 내던지며 좋은 책 따위는 질색이라고 맹세했다. 히스클리프도 제 책을 같은 곳으로 걷어찼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쥔 나리!' 우리 전속 목사님이 고함을 질렀다. '쥔 나리, 이리 와 보시우! 캐서린 아가씨가 「구원의 투구」 등짝을 뜯어 놨고, 히스클리프 놈은 「멸망에 이르는 넓은 길」 첫째 권을 발로 짓밟았구려! 이렇게 제멋대로 놀게 두다니 참말 끔찍한 일이우. 에잇! 돌아가신 영감님이었으면 아주 단단히 매질을 했을 텐데, 허나 그분은 가셨으니!'
"힌들리가 난롯가의 낙원에서 허둥지둥 달려와, 우리 하나는 멱살을, 하나는 팔을 잡고 둘 다 뒷부엌으로 내던졌다. 조지프는 우리가 살아 있는 것만큼이나 틀림없이 '늙은 마귀'가 우리를 데려갈 거라고 단언했고, 그런 위로를 받고서 우리는 마귀가 오기를 기다리며 각자 따로 구석을 하나씩 찾아 들어갔다. 나는 선반에서 이 책과 잉크병을 꺼내고, 빛이 들게 큰방 문을 살짝 열어 놓고 20분 동안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내 짝꿍이 안달이 나서, 젖 짜는 아주머니의 외투를 빌려 그걸 뒤집어쓰고 황야로 뛰쳐나가 한바탕 달리자고 한다. 좋은 생각이다. 게다가 그 심술궂은 노인이 들어오면 자기 예언이 맞았다고 믿을 테고. 빗속에 있어 봤자 여기보다 더 축축하거나 더 춥지는 않을 거다."
캐서린은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던 모양이다. 다음 문장은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서, 눈물 바람이 되어 있었다.
"힌들리가 나를 이렇게 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캐서린은 이렇게 썼다. "머리가 아파서 베개에 머리를 대고 있을 수도 없을 지경인데, 그래도 울음을 그칠 수가 없다. 불쌍한 히스클리프!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떠돌이라고 부르고, 이제는 우리하고 같이 앉지도, 같이 먹지도 못하게 한다. 그리고 히스클리프와 나는 같이 놀아서도 안 되고, 우리가 자기 명령을 어기면 히스클리프를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을러댄다. 힌들리는 아버지가 H를 너무 너그럽게 대했다고 아버지 탓을 하고 있고(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히스클리프를 제 분수에 맞는 자리로 끌어내리겠다고 맹세한다……"
나는 흐릿한 쪽 위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내 눈은 어느새 손글씨에서 인쇄된 글자로 옮겨 갔다. 붉은 꽃무늬로 꾸민 제목이 보였다. 「일흔 번씩 일곱 번1, 그리고 일흔한 번째의 첫째. 기머든 개울 예배당에서 제이베즈 브랜더럼 목사가 행한 경건한 설교」. 제이베즈 브랜더럼이 이 주제로 무슨 이야기를 할지 반쯤 넋이 나간 채 머리를 짜내 짐작하는 사이에, 나는 침대 위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아, 고약한 차와 고약한 성미가 이런 결과를 낳다니! 그것 말고 무엇이 나를 그토록 끔찍한 밤을 보내게 했겠는가? 고통을 느낄 줄 알게 된 뒤로 그날 밤과 조금이라도 견줄 만한 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어디 있는지 미처 잊기도 전에 꿈이 시작되었다. 아침이 된 것 같았고, 나는 조지프를 길잡이 삼아 집으로 가는 길에 올라 있었다. 길에는 눈이 몇 야드나 쌓여 있었다. 우리가 허우적거리며 나아가는 동안, 길동무는 내가 순례자의 지팡이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쉴 새 없이 나무라서 나를 지치게 했다. 그게 없으면 결코 집 안에 들어갈 수 없을 거라면서, 머리가 묵직한 몽둥이 하나를 자랑스럽게 휘둘러 보였는데, 나는 그것이 바로 순례자의 지팡이라는 물건이라고 알아들었다. 잠깐은 내 집에 들어가는 데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니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새로운 생각이 번뜩 스쳤다. 나는 집으로 가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그 유명한 제이베즈 브랜더럼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구절로 설교하는 것을 들으러 가는 길이었고, 조지프든 그 목사든 나든 누군가가 '일흔한 번째의 첫째' 죄를 지어서 공개적으로 폭로되고 파문당할 참이었다.
우리는 예배당에 이르렀다. 산책길에 실제로 두세 번 그 앞을 지나간 적이 있다. 예배당은 두 언덕 사이의 우묵한 땅, 그것도 높은 데 있는 우묵한 땅에 자리 잡고 있는데, 가까이 늪이 있어서 그 늪의 토탄 습기가 그곳에 묻힌 몇 안 되는 시신을 미라로 만드는 데 그만이라는 말이 있다. 지붕은 아직까지 성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목사의 봉급이라고는 한 해에 20파운드와 방 두 칸짜리 집 한 채뿐이고, 그 집마저 머지않아 방 한 칸짜리가 될 판이라, 어느 성직자도 목자 노릇을 맡으려 들지 않는다. 더구나 그곳 신도들은 제 주머니에서 한 푼이라도 더 내서 목사의 살림을 늘려 주느니 차라리 굶어 죽게 내버려 둘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런데 꿈속에서는 제이베즈의 회중이 빈자리 없이 가득 차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는 설교를 했다. 맙소사! 그게 무슨 설교였던가. 사백아흔 대목으로 나뉘었는데, 대목마다 보통 설교단에서 하는 설교 한 편과 맞먹었고, 대목마다 저마다 다른 죄를 하나씩 다루었다! 그 많은 죄를 어디서 찾아냈는지 나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그 구절을 저 나름대로 풀이했는데, 그 풀이대로라면 형제는 그때마다 다른 죄를 지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 죄들은 몹시도 기괴해서, 전에는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별난 허물들이었다.
아, 얼마나 지루했던가. 나는 얼마나 몸을 비틀고 하품을 하고 꾸벅꾸벅 졸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던가! 얼마나 나를 꼬집고 찌르고 눈을 비비고, 일어섰다가 다시 앉고, 조지프를 쿡쿡 찔러 저 설교가 언제 끝나기는 하는 거냐고 물었던가! 나는 끝까지 다 들어야 하는 벌을 받았다. 마침내 그가 '일흔한 번째의 첫째'에 이르렀을 때, 그 고비에서 갑자기 나에게 영감이 내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어느 그리스도인도 용서할 필요가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이 바로 제이베즈 브랜더럼이라고 고발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혔다.
"목사님." 내가 외쳤다. "저는 이 네 벽 안에 앉아 단숨에 목사님 설교의 사백아흔 대목을 견디고 용서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저는 모자를 집어 들고 떠나려 했고, 일흔 번씩 일곱 번 목사님은 터무니없게도 저를 도로 앉혔습니다. 사백아흔한 번째는 너무합니다. 순교자 동지 여러분, 저자를 치시오! 끌어내려 산산조각을 내시오. 그를 알던 자리가 다시는 그를 알지 못하도록!"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 제이베즈가 엄숙하게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설교대의 방석 위로 몸을 숙이며 외쳤다. "일흔 번씩 일곱 번 너는 입을 벌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일흔 번씩 일곱 번 나는 내 영혼과 의논하였다. 보라, 이것은 인간의 나약함이니 이 또한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일흔한 번째의 첫째가 왔다. 형제들이여, 기록된 심판을 그에게 집행하라. 그분의 모든 성도에게 이런 영광이 있을지어다!"
그 마지막 말과 함께 회중 전체가 순례자의 지팡이를 높이 쳐들고 한 덩어리가 되어 나를 에워싸고 달려들었고, 몸을 지킬 무기가 없던 나는 가장 가까이 있고 가장 사납게 덤비는 조지프와 그의 지팡이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했다. 사람들이 한데 몰리는 통에 몽둥이 여러 개가 엇갈렸고 나를 겨눈 매가 엉뚱한 머리통에 떨어졌는데, 이윽고 온 예배당이 두드리고 맞받아 두드리는 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저마다 이웃에게 손을 들었고, 브랜더럼도 가만있기 싫었던지 설교단 널빤지를 요란하게 두드려 대며 열성을 쏟아부었다. 널빤지가 어찌나 따닥따닥 날카롭게 울리던지, 마침내 그 소리에 나는 잠이 깼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안도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소란을 일으킨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 난리 속에서 제이베즈 노릇을 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고작 전나무 가지 하나였다. 돌풍이 울부짖으며 지나갈 때마다 그 가지가 내 격자창을 건드리며 마른 솔방울을 유리창에 달그락달그락 부딪쳤던 것이다! 나는 잠깐 미심쩍어하며 귀를 기울였고, 소란을 피운 범인을 알아내고는 돌아누워 다시 졸다가, 할 수만 있다면 앞의 꿈보다 더 불쾌한 꿈을 또 꾸었다.
이번에는 내가 참나무 상자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세찬 바람 소리와 휘몰아치는 눈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전나무 가지가 성가신 소리를 되풀이하는 것도 들렸고, 나는 그 소리를 제대로 그 가지 탓으로 돌렸다. 그런데 그 소리가 하도 거슬려서 할 수만 있다면 멈추게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래서 일어나 여닫이창의 걸쇠를 풀려고 애썼던 것 같다. 걸쇠는 고리에 납땜이 되어 있었는데, 깨어 있을 때 보아 두고도 그만 잊어버린 일이었다. "그래도 저 소리는 멈추게 해야겠다!" 나는 웅얼거리며 주먹으로 유리를 깨고, 그 성가신 가지를 잡으려고 팔을 내뻗었다. 그런데 가지 대신 내 손가락에 잡힌 것은 얼음처럼 차가운 작은 손의 손가락이었다!
악몽의 지독한 공포가 나를 덮쳤다. 나는 팔을 도로 빼려 했지만 그 손은 내 팔에 매달려 놓지 않았고, 더없이 구슬픈 목소리가 흐느꼈다.
"들여보내 줘, 들여보내 줘!"
"누구냐?" 나는 물으면서도 손을 빼내려고 버둥거렸다.
"캐서린 린턴." 그 목소리가 덜덜 떨며 대답했다(내가 왜 린턴을 떠올렸을까? 언쇼는 린턴보다 스무 번이나 더 읽었는데). "집에 돌아왔어요. 황야에서 길을 잃었었어요!"
그 목소리가 말하는 동안 창 너머로 들여다보는 아이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공포가 나를 잔인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떨쳐 내려 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 손목을 깨진 유리창 위로 끌어당겨 피가 흘러내려 이불을 흠뻑 적실 때까지 이리저리 문질렀다. 그래도 그것은 "들여보내 줘!" 하고 울부짖으며 끈질기게 붙든 손을 놓지 않았고, 나는 무서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어떻게 들여보내!" 마침내 내가 말했다. "들여보내 주기를 바란다면 나부터 놔!"
손가락이 풀렸다. 나는 내 손을 구멍에서 홱 빼내고, 서둘러 책을 피라미드처럼 쌓아 구멍을 막고는 그 구슬픈 애원이 들리지 않게 귀를 틀어막았다.
귀를 틀어막고 있었던 것이 15분은 넘은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귀를 기울이는 순간, 그 구슬픈 울음소리가 여전히 흐느끼고 있었다!
"꺼져!" 내가 소리쳤다. "스무 해를 빌어도 절대로 들여보내 주지 않겠다."
"스무 해예요." 목소리가 슬피 울었다. "스무 해. 스무 해 동안 떠돌았어요!"
그러자 바깥에서 무언가 힘없이 긁어 대기 시작했고, 쌓아 둔 책 더미가 누가 앞으로 미는 것처럼 움찔 움직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팔다리 하나 꼼짝할 수가 없어서 겁에 질려 미친 듯이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당황스럽게도 그 비명은 꿈속의 비명이 아니었다. 다급한 발소리가 내 방 문으로 다가오더니 누군가가 힘센 손으로 문을 밀어젖혔고, 침대 위쪽의 네모난 구멍들 사이로 불빛이 어른거렸다. 나는 여전히 덜덜 떨면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앉아 있었다. 들어온 사람은 망설이는 듯하더니 혼자 뭐라고 웅얼거렸다.
마침내 그가 대답을 바라지 않는 게 분명한 목소리로 반쯤 속삭이듯 말했다.
"누가 여기 있나?"
내가 여기 있다고 털어놓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히스클리프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들었고, 내가 가만있으면 그가 더 샅샅이 뒤질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돌아앉아 판자 문을 열었다. 내 그 행동이 일으킨 결과를 나는 쉬 잊지 못할 것이다.
히스클리프는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문간 가까이에 서 있었는데, 촛농이 손가락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얼굴은 등 뒤의 벽만큼이나 하얗게 질려 있었다. 참나무 문이 처음 삐걱하는 소리에 그는 전기에 감전된 듯 소스라쳤다. 초가 그의 손에서 튀어 몇 피트 밖으로 날아갔고, 그는 어찌나 정신없이 허둥대는지 그것을 제대로 주워 들지도 못했다.
"선생 댁 손님일 뿐입니다." 나는 그가 겁먹은 꼴을 더 드러내는 창피를 면하게 해 주고 싶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무서운 악몽을 꾸다가 그만 잠결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주무시는 데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 빌어먹을, 록우드 씨! 차라리 당신이 지옥에나……" 집주인이 말을 꺼내다 말고 초를 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손이 떨려서 초를 똑바로 들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누가 당신을 이 방으로 데려왔소?" 그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움켜쥐고, 턱이 떨리는 것을 누르려고 이를 갈면서 말을 이었다. "누구였소? 당장 그놈을 집에서 내쫓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오!"
"선생 댁 하녀 질라였습니다." 나는 바닥으로 뛰어내려 서둘러 옷을 다시 걸치며 대답했다. "히스클리프 씨, 내쫓으셔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싸니까요. 아마 이 방에 귀신이 나온다는 증거를 하나 더 얻고 싶었나 본데, 하필 저를 제물 삼았지요. 그래요, 귀신이 나옵니다. 유령이며 도깨비가 우글거립니다! 장담하건대 선생께서 이 방을 닫아 두시는 데는 다 까닭이 있었군요. 이런 소굴에서 눈을 붙이게 해 줬다고 고마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무슨 소리요?" 히스클리프가 물었다. "그리고 지금 뭘 하는 거요? 기왕 여기 있으니 누워서 남은 밤이나 마저 보내시오. 하지만 제발 그 끔찍한 소리는 다시 내지 마시오. 누가 목을 따는 게 아니라면 그런 소리는 무엇으로도 변명이 안 되오!"
"그 꼬마 악마가 창으로 들어왔더라면 아마 저를 목 졸라 죽였을 겁니다!" 내가 맞받았다. "선생의 손님 대접 좋은 조상님들한테 또 시달리는 일은 참지 않겠습니다. 제이베즈 브랜더럼 목사가 외가 쪽 친척이 아니었던가요? 그리고 그 말괄량이, 캐서린 린턴인지 언쇼인지 뭐라고 불렸든 간에, 그 아이는 분명히 요정이 바꿔치기한 아이였을 겁니다. 못된 작은 영혼 같으니! 지난 스무 해 동안 이 땅을 헤매고 다녔다고 하더군요. 살아서 지은 죄에 대한 마땅한 벌이겠지요, 틀림없이!"
그 말이 입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책 속에서 히스클리프의 이름과 캐서린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던 것을 떠올렸다. 이렇게 다시 깨어날 때까지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경솔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그 실례를 더 의식하는 티를 내지 않고 서둘러 덧붙였다. "사실은 말입니다, 저는 초저녁을……" 여기서 나는 또 말을 멈추었다. '그 옛 책들을 읽으며'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책에 인쇄된 내용뿐 아니라 손으로 쓴 내용까지 안다는 것이 드러날 터였다. 그래서 말을 바로잡아 이렇게 이어 갔다. "저 창턱에 긁어 새긴 이름을 한 자 한 자 읽으며 보냈습니다. 숫자를 세거나 하는 것처럼 지루해서 잠이 오게 만드는 일이지요, 아니면……"
"도대체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다니 무슨 뜻이오!" 히스클리프가 사납게 벼락같이 고함쳤다. "어떻게, 어떻게 감히 내 집 지붕 밑에서! 하느님! 저자가 미쳤구나, 저런 소리를 하다니!" 그러고는 분에 못 이겨 제 이마를 쳤다.
나는 그런 말을 들었다고 화를 내야 할지 설명을 계속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몹시 격하게 흔들리는 것 같아서 가엾은 마음에 꿈 이야기를 이어 갔다. '캐서린 린턴'이라는 이름은 그전에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그 이름을 자꾸 되풀이해 읽었더니 그 인상이 남아 있다가 내가 더는 상상을 다스리지 못하게 되자 사람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내가 말하는 동안 히스클리프는 차츰 침대 그늘 쪽으로 물러나더니, 마침내 거의 침대 뒤에 몸을 숨기다시피 하고 주저앉았다. 그러나 고르지 못하게 끊어지는 숨소리로 보아 그가 북받치는 격한 감정을 이겨 내려고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몸부림을 내가 들었다는 것을 내보이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일부러 소리를 내며 몸단장을 계속하고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밤이 길다고 혼잣말을 했다. "아직 세 시도 안 됐군! 여섯 시는 됐을 거라고 맹세라도 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는 시간이 고여 있는 것 같아. 분명 여덟 시에 잠자리에 들었을 텐데!"
"겨울에는 늘 아홉 시에 자고 네 시에 일어나오." 집주인이 신음을 삼키며 말했다. 그리고 그의 팔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니, 내 생각에는 눈에서 눈물을 훔쳐 내는 것 같았다. "록우드 씨." 그가 덧붙였다. "내 방으로 가도 좋소. 이렇게 일찍 아래층에 내려가 봐야 걸리적거리기만 할 거요. 그리고 당신이 어린애처럼 질러 댄 고함 덕에 내 잠은 마귀한테 날아가 버렸소."
"제 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마당을 거닐다가 떠나겠습니다. 제가 또 쳐들어올까 봐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시골이건 도시건 사람들 사이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던 병은 이제 깨끗이 나았으니까요.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만으로도 넉넉한 벗을 삼을 수 있어야 하는 법이지요."
"참 즐거운 벗이로군!" 히스클리프가 웅얼거렸다. "초를 들고 가고 싶은 데로 가시오. 나도 곧 따라가겠소. 그런데 마당에는 나가지 마시오. 개들이 풀려 있소. 그리고 큰방은…… 주노가 거기서 보초를 서고 있고…… 아니, 계단이나 복도에서나 어슬렁거릴 수밖에 없겠구려. 아무튼 어서 나가시오! 2분 뒤에 가겠소!"
나는 시키는 대로 방을 나가기는 했다. 그러나 좁은 복도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몰라서 가만히 서 있었고, 그 바람에 겉보기에는 분별 있는 집주인이 묘하게도 그 분별과 어울리지 않는 미신 같은 짓을 하는 것을 본의 아니게 지켜보게 되었다. 그는 침대 위로 올라가 격자창을 비틀어 열더니, 창을 잡아당기면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터뜨렸다. "들어와! 들어와!" 그가 흐느꼈다. "캐서린, 제발 와. 아, 제발, 한 번만 더! 아! 내 사랑, 내 마음의 사랑! 이번에는 내 말을 들어 줘, 캐서린, 이번만은!" 유령은 유령다운 변덕을 부렸다. 거기 있다는 기척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눈과 바람이 창으로 세차게 휘몰아쳐 들어와 내가 선 자리까지 닿더니 촛불을 꺼 버렸다.
그 헛소리와 함께 쏟아진 슬픔에는 어찌나 깊은 고뇌가 담겨 있던지, 나는 가엾은 마음에 그 어리석음을 못 본 척 넘어가 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엿들은 것이 반쯤 화가 나고, 그토록 괴로워할 줄 알았더라면 우스꽝스러운 악몽 이야기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을 하고 언짢아하며 그 자리를 물러났다. 왜 그토록 괴로워하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나는 조심조심 아래층으로 내려가 뒷부엌에 이르렀는데, 거기에는 불씨를 한데 그러모아 둔 화덕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어서 촛불을 다시 붙일 수 있었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얼룩덜룩한 회색 고양이 한 마리뿐이었는데, 고양이는 잿더미 속에서 기어 나와 투정하듯 야옹 하고 인사했다.
반원 꼴로 휜 긴 의자 두 개가 화덕을 거의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그 하나에 몸을 뻗고 누웠고, 회색 고양이는 다른 하나에 올라갔다. 우리 둘 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누군가 우리의 은신처에 들이닥쳤다. 조지프였다. 그는 천장의 뚜껑 문 속으로 사라지는 나무 사다리를 발을 질질 끌며 내려왔다. 아마 그의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인 듯했다. 그는 내가 화덕 쇠살 사이에서 살살 꾀어 피워 놓은 작은 불꽃을 음흉하게 노려보더니, 고양이를 높은 자리에서 쓸어내리고 그 빈자리에 제 몸을 앉혔다. 그리고 3인치짜리 파이프에 담배를 쑤셔 넣는 작업을 시작했다. 자기의 지성소에 내가 들어와 있는 것은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뻔뻔한 짓으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그는 말없이 파이프를 입에 물고 팔짱을 낀 채 뻐끔뻐끔 연기를 뿜었다. 나는 그가 그 사치를 방해받지 않고 누리게 내버려 두었고, 그는 마지막 연기 고리를 빨아들이고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들어올 때처럼 엄숙하게 일어나 나가 버렸다.
다음에는 좀 더 탄력 있는 발소리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안녕하시오'라고 인사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끝내 인사를 못 하고 도로 다물었다. 헤어턴 언쇼가 눈 더미를 파헤칠 삽이나 가래를 찾아 한구석을 뒤지면서, 손에 닿는 물건마다 욕을 한마디씩 퍼붓는 것으로 나지막이 아침 기도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긴 의자 등받이 너머로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흘끗 쳐다보았는데, 나와 인사를 나눌 생각은 내 동무인 고양이와 인사를 나눌 생각만큼도 없어 보였다. 그가 채비하는 것을 보고 이제 밖에 나가도 되겠다고 짐작한 나는 딱딱한 잠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가려는 몸짓을 했다. 그는 그것을 알아채고 삽 끝으로 안쪽 문을 쿡 밀어젖히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서 내가 자리를 옮기려면 저기로 가야 한다는 뜻을 비쳤다.
그 문은 큰방으로 통했는데, 여자들은 벌써 일어나 움직이고 있었다. 질라는 커다란 풀무로 불꽃을 굴뚝 위로 날려 보내고 있었고, 히스클리프 부인은 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불빛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부인은 불의 열기와 제 눈 사이에 손을 대고 책 읽기에 푹 빠져 있는 듯했는데, 하녀가 불똥을 자기한테 튀긴다고 나무라거나 이따금 너무 버릇없이 얼굴에 코를 들이미는 개를 밀어낼 때만 책에서 눈을 뗐다. 그곳에 히스클리프도 있어서 나는 놀랐다. 그는 나를 등지고 불 옆에 서서 가엾은 질라와 한바탕 폭풍 같은 장면을 막 끝내는 참이었는데, 질라는 하던 일을 자꾸 멈추고 앞치마 귀퉁이를 걷어 올리며 분하다는 듯 끙끙 신음했다.
"그리고 너, 이 쓸모없는……" 내가 들어서자 그가 며느리에게로 돌아서며 내뱉었다. 오리나 양처럼 해롭지 않은 말이지만 흔히 줄표로 가려 적는 그런 욕이었다. "너는 또 거기서 빈둥빈둥 놀고 있구나! 다른 사람들은 다 제 밥벌이를 하는데 너는 내 자선으로 먹고살잖아! 그 쓰레기는 치우고 할 일이나 찾아. 네가 영원히 내 눈앞에 붙어 있는 이 골칫거리 값을 치르게 해 주마. 알아들어, 이 저주받을 계집?"
"쓰레기는 치울게요. 내가 싫다고 해도 당신은 억지로 치우게 할 수 있으니까." 젊은 부인이 책을 덮어 의자 위로 내던지며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이 혀가 빠지도록 욕을 퍼부어도, 내가 하고 싶은 일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히스클리프가 손을 쳐들자 부인은 그 손이 얼마나 매운지 잘 아는 듯 안전한 거리로 훌쩍 물러났다. 개와 고양이의 싸움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므로, 나는 화롯불의 온기를 함께 쬐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그리고 중간에 끊긴 말다툼 따위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활기차게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 다 더 이상의 싸움을 멈출 만큼의 예의는 있었다. 히스클리프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두 주먹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고, 히스클리프 부인은 입술을 비죽이며 멀찍이 떨어진 자리로 걸어가 앉더니, 내가 머무는 동안 내내 석상 노릇을 하며 아까 한 말을 지켰다. 그 시간도 길지는 않았다. 나는 함께 아침을 들자는 말을 사양하고, 첫 새벽빛이 비치자마자 틈을 타서 바깥의 자유로운 공기 속으로 빠져나갔다. 공기는 이제 맑고 고요했으며, 손에 잡히지 않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정원 끝에 이르기도 전에 집주인이 멈추라고 소리쳐 부르더니 황야를 건너는 길을 함께 가 주겠다고 나섰다. 그가 그렇게 해 준 것이 다행이었다. 언덕배기 전체가 물결치는 하나의 흰 바다였고, 그 오르내리는 물결은 땅의 높낮이와 들어맞지 않았다. 적어도 움푹한 구덩이 여럿이 평평하게 메워져 있었고, 채석장에서 나온 돌무더기 둔덕이 줄줄이 늘어선 것도, 어제 걸으며 내 머릿속에 그려 둔 지도에서 송두리째 지워져 있었다. 길 한쪽에는 예닐곱 야드 간격으로 똑바로 선 돌이 한 줄로 이 황무지 끝까지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아 두었다. 그 돌들은 어둠 속에서, 그리고 지금처럼 눈이 내려 양쪽의 깊은 늪과 단단한 길을 분간할 수 없게 될 때 길잡이가 되라고 일부러 세우고 석회를 칠해 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저기 지저분한 점 하나가 위로 비죽 솟은 것 말고는 그 돌들이 있었던 흔적이 모두 사라져 버려서, 나는 길이 굽은 대로 제대로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길동무는 오른쪽으로 가라, 왼쪽으로 가라 하고 자주 일러 주어야 했다.
우리는 말을 거의 주고받지 않았고, 그는 스러시크로스 영지 어귀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여기서부터는 길을 잃을 리 없다고 말했다. 우리의 작별 인사는 급히 고개를 한 번 숙이는 것으로 끝났고, 나는 내 힘만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 문지기 집에는 아직 사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대문에서 그레인지까지는 2마일인데, 나무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목까지 눈에 파묻히고 하는 사이에 나는 그 거리를 4마일로 늘려 놓은 것 같다. 그런 곤경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어쨌든 얼마나 헤맸든 간에 내가 집 안에 들어섰을 때 시계가 열두 시를 쳤는데, 그러니 워더링 하이츠에서 오는 보통 길로 치면 1마일에 꼭 한 시간씩 걸린 셈이었다.
집에 딸린 붙박이 세간인 가정부와 그 졸개들이 나를 맞으러 달려 나와, 내가 살아 돌아오리라는 희망은 완전히 버렸다고 저마다 떠들썩하게 외쳤다. 다들 내가 어젯밤에 죽었으리라 짐작하고, 내 유해를 어떻게 찾아 나서야 할지 궁리하던 참이었다. 나는 내가 돌아온 것을 보았으니 이제 조용히 하라고 이르고는, 뼛속까지 얼어붙은 몸을 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몸의 온기를 되찾으려고 30~40분 동안 이리저리 서성인 뒤 서재로 옮겨 갔는데, 새끼 고양이처럼 기운이 없어서 하인이 나를 위해 마련해 둔 따뜻한 불과 김이 오르는 커피를 즐길 기운조차 거의 없었다.
주
1. 마태복음 18장 21~22절.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는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답한 데서 나온 말이다. 브랜더럼의 설교는 이 사백아흔 번을 넘긴 다음 죄, 곧 용서받지 못할 '일흔한 번째의 첫째' 죄를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