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장 고래의 흰빛
흰 고래가 에이해브에게 무엇이었는지는 이미 넌지시 비쳤다. 그 고래가 때때로 나에게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말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누구의 영혼에서든 이따금 얼마쯤 두려움을 일깨우지 않을 수 없는, 모비 딕에 관한 그 더 뻔한 고려들 말고도, 그놈에 관해서는 다른 생각, 아니 차라리 어렴풋하고 이름 없는 공포가 있었다. 그것은 때로 그 강렬함으로 다른 모든 것을 완전히 압도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너무나 신비롭고 거의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꼴로 내놓을 수 있을지 나는 거의 절망한다. 무엇보다 나를 질겁하게 한 것은 그 고래의 흰빛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어떻게 내 뜻을 풀어 보일 수 있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래도 어렴풋하게나마, 되는대로라도 나는 내 뜻을 풀어 보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모든 장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여러 자연의 사물에서 흰빛은 마치 저만의 특별한 미덕이라도 나누어 주듯 아름다움을 한층 정련해 높여 준다. 대리석과 동백꽃과 진주에서처럼. 그리고 여러 나라가 어떻게든 이 빛깔에 일종의 왕다운 으뜸가는 자리를 인정해 왔다. 페구의 야만스럽고 장엄한 옛 왕들조차 「흰 코끼리들의 주인」이라는 칭호를 다른 모든 거창한 지배의 칭호 위에 두었고, 오늘날 시암의 왕들은 바로 그 눈처럼 흰 네발짐승을 왕기에 펼쳐 달며, 하노버의 깃발에는 눈처럼 흰 군마 하나만이 그려져 있고, 지배하던 로마의 상속자인 카이사르의 위대한 오스트리아 제국은 바로 그 제왕다운 빛깔을 황실의 빛깔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 으뜸가는 자리는 인류 자체에도 적용되어, 흰 사람에게 모든 거무스름한 족속 위에 서는 이상적인 주인 자리를 준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말고도 흰빛은 기쁨을 뜻하는 것으로까지 여겨졌으니, 로마 사람들 사이에서는 흰 돌이 기쁜 날을 표시했다. 그리고 인간의 다른 공감과 상징 속에서도 이 같은 빛깔은 많은 감동적이고 고귀한 것, 신부의 순결, 노년의 자애의 표상이 된다. 아메리카의 붉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가비 구슬로 엮은 흰 띠를 주는 것이 가장 깊은 명예의 서약이었다. 여러 고장에서 흰빛은 재판관의 흰 담비 털옷에서 정의의 위엄을 나타내고, 우윳빛 흰 말들이 끄는 왕과 왕비들의 날마다의 위엄을 거든다. 가장 존엄한 종교들의 더 높은 신비에서도 흰빛은 신의 티 없음과 권능의 상징이 되었다. 페르시아의 배화교도들은 제단 위의 갈라진 흰 불꽃을 가장 거룩하게 여겼고, 그리스 신화에서는 위대한 유피테르 자신이 눈처럼 흰 황소로 몸을 입었다. 고귀한 이로쿼이족에게는 거룩한 흰 개를 한겨울에 바치는 제사가 그들의 신학에서 단연 가장 거룩한 축제였는데, 그 티 없고 충실한 짐승은 그들이 해마다 저희의 충성을 알리러 위대한 정령에게 보낼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사절로 여겨졌다. 모든 기독교 사제는 흰빛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곧바로 그들의 거룩한 제의 한 가지의 이름을 따오니, 수단 밑에 입는 장백의, 곧 알바가 그것이다. 로마 가톨릭 신앙의 거룩한 의식들 가운데서도 흰빛은 우리 주의 수난을 기리는 데 특별히 쓰인다. 성 요한의 계시에서는 구원받은 이들에게 흰옷이 주어지고, 스물네 장로가 흰옷을 입고 크고 흰 보좌 앞에 서며, 거기 앉으신 거룩한 이는 양털처럼 희다. 그러나 달콤하고, 존귀하고, 숭고한 모든 것과 이어진 이 쌓이고 쌓인 연상에도 불구하고, 이 빛깔의 가장 깊은 관념 속에는 붙잡을 수 없는 무언가가 숨어 있어서, 피 속에서 사람을 겁먹게 하는 그 붉은빛보다 더 큰 공포를 영혼에 내리친다.
흰빛이라는 생각이 더 다정한 연상에서 떨어져 나와, 그 자체로 무시무시한 어떤 대상과 짝지어질 때 그 공포를 가장 먼 끝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바로 이 붙잡을 수 없는 성질이다. 극지의 흰곰과 열대의 백상아리를 보라. 그 매끄럽고 눈송이 같은 흰빛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것들을 그토록 뛰어넘는 공포로 만들겠는가? 그것들이 말없이 노려보는 모습에, 무시무시하다기보다 더 역겨운, 그토록 끔찍한 부드러움을 나누어 주는 것은 바로 그 섬뜩한 흰빛이다. 그래서 문장(紋章) 같은 털옷을 입은 송곳니 사나운 호랑이도 흰 수의를 두른 곰이나 상어만큼 용기를 비틀거리게 하지는 못한다.1
백상아리로 말하자면, 평소의 기분일 때 그 짐승에게서 보이는 쉬고 있는 흰 유령이 미끄러져 가는 듯한 모습은 극지 네발짐승의 같은 성질과 이상하게 들어맞는다. 이 특징은 프랑스 사람들이 그 물고기에 붙인 이름이 가장 생생하게 맞혀 낸다. 죽은 이를 위한 로마 가톨릭 미사는 「레퀴엠 에테르남」(영원한 안식)으로 시작하고, 거기서 레퀴엠이 그 미사 자체와 다른 모든 장례 음악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런데 이 상어에게 있는 죽음의 희고 말 없는 고요함과 그 습성의 부드러운 치명성을 빗대어, 프랑스 사람들은 그놈을 레캥이라고 부른다.
앨버트로스를 생각해 보라. 그 흰 유령이 모든 이의 상상 속을 떠가며 두르고 있는 영적인 경이와 창백한 두려움의 구름은 어디서 오는가? 그 마법을 처음 건 것은 콜리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고 아첨할 줄 모르는 계관 시인, 자연이었다.2
그러니 나는 단언한다. 그 마법의 비밀은 주로 그 새의 놀라운 몸의 흰빛에 숨어 있다고. 낱말이 서로 어긋나게도 회색 앨버트로스라고 불리는 새들이 있다는 점이 이 진실을 더욱 똑똑히 보여 준다. 나는 그 새들을 자주 보았지만, 남극의 그 새를 보았을 때와 같은 감정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 신비로운 것은 어떻게 잡혔던가? 소문을 내지 않는다면 말해 주겠다. 그 새가 바다에 떠 있을 때 간사한 낚싯바늘과 낚싯줄로 잡았다. 마침내 선장은 그 새를 우편배달부로 삼았다. 배의 시각과 위치를 글자로 적은 가죽 꼬리표를 그 목에 매어 놓아준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보내는 그 가죽 꼬리표는, 그 흰 새가 날개를 접고 기도하며 경배하는 케루빔의 무리에 끼려고 날아갔을 때 하늘에서 떼어졌으리라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 서부의 연대기와 인디언의 전승에서 가장 이름난 것은 대초원의 흰 말 이야기다. 우윳빛 흰 군마로 눈이 크고 머리가 작으며 가슴이 떡 벌어지고, 높고 모든 것을 깔보는 몸가짐에는 천 명의 군주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 말은 거대한 야생마 떼가 뽑은 크세르크세스였는데, 그 시절 그 떼의 목초지는 로키산맥과 앨러게니산맥만이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그 말은 불타오르는 무리의 맨 앞에서, 저녁마다 빛의 군대를 이끄는 그 선택받은 별처럼 서쪽으로 무리를 이끌고 나아갔다. 번쩍이며 흘러내리는 폭포 같은 갈기와 휘어진 혜성 같은 꼬리는 금박장이와 은박장이가 꾸며 줄 수 있었을 것보다 더 찬란한 마구를 그 말에게 입혀 주었다. 타락하지 않은 저 서부 세계의 더없이 제왕답고 대천사 같은 환영으로, 그 말은 옛 덫사냥꾼들과 사냥꾼들의 눈에 아담이 신처럼 위엄 있게, 이 힘센 말처럼 이마를 떡 펴고 두려움 없이 걷던 태초 시대의 영광을 되살려 주었다. 오하이오강처럼 끝없이 들판을 흘러가는 헤아릴 수 없는 무리의 선두에서 부관들과 장군들에 둘러싸여 행진할 때든, 사방에 둘러선 신민들이 수평선 언저리까지 온통 풀을 뜯고 있을 때든, 흰 말은 시원한 우윳빛 사이로 붉게 달아오른 따뜻한 콧구멍으로 질주하며 그들을 사열했다. 그 말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가장 용감한 인디언들에게도 그 말은 언제나 떨리는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 고귀한 말에 관해 전설로 남은 기록을 보면, 그 말에게 그토록 신성함을 입힌 것은 주로 그 영적인 흰빛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 신성함에는 숭배를 명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이름 없는 공포를 강요하는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흰빛이 흰 말과 앨버트로스에서 그것을 감싸는 그 덧붙은 이상한 영광을 모두 잃어버리는 다른 예들도 있다.
알비노 사람에게서 그토록 유난히 눈을 밀어내고 흔히 충격을 주어, 때로는 그의 피붙이에게서조차 미움을 받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를 감싸는 그 흰빛이고, 그가 지닌 이름이 그것을 나타낸다. 알비노는 다른 사람들처럼 잘생겼다. 실질적인 기형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온몸에 두루 퍼진 흰빛이라는 이 겉모습 하나만으로 그는 가장 흉한 기형아보다 더 이상하게 흉측해진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가?
전혀 다른 모습들에서도 자연은 가장 손에 잡히지 않지만 그렇다고 덜 악의적이지도 않은 힘들 속에 공포의 이 으뜸가는 속성을 제 군대로 끌어들이지 않는 법이 없다. 그 눈 같은 모습 때문에 남양의 장갑 낀 유령은 흰 돌풍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몇몇 역사적인 예에서는 인간의 악의가 부리는 술수도 그토록 강력한 원군을 빠뜨리지 않았다. 헨트의 필사적인 흰 두건단이 저희 당파의 눈처럼 흰 상징으로 얼굴을 가리고 장터에서 저희 집행관을 살해하는 프루아사르의 그 대목은 그 덕분에 얼마나 사납게 효과가 높아지는가!
어떤 일들에서는 온 인류가 대물림해 온 공통의 경험도 이 빛깔의 초자연성을 증언하지 않는 법이 없다. 죽은 이의 얼굴에서 바라보는 사람을 가장 질겁하게 하는 눈에 보이는 성질이 거기 남아 있는 대리석 같은 창백함이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마치 그 창백함이 이승에서 죽어 가는 자의 떨림의 표지인 것만큼이나 저승에서 겪는 공포의 표지이기도 하다는 듯이. 그리고 죽은 이의 그 창백함에서 우리는 그들을 감싸는 수의의 표정 어린 빛깔을 빌려 온다. 우리의 미신에서도 우리는 우리 유령들에게 똑같이 눈처럼 흰 망토를 두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모든 유령은 우윳빛 흰 안개 속에서 일어선다. 그렇다, 이 공포들이 우리를 사로잡는 동안 덧붙여 두자. 공포의 왕조차 복음서 기자가 사람의 꼴로 그릴 때는 창백한 말을 탄다.
그러므로 다른 기분일 때 사람이 흰빛으로 어떤 웅대하거나 우아한 것을 상징하든, 그 가장 깊이 이상화된 뜻에서 흰빛이 영혼에 독특한 환영을 불러낸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점이 이의 없이 정해진다 해도, 죽을 운명의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분석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흰빛이라는 것이 한동안 그것에 무언가 무서운 것을 나누어 줄 직접적인 연상을 모두, 또는 대부분 벗겨 낸 상태인데도, 아무리 달라졌다 해도 우리에게 똑같은 마술을 부리는 것으로 드러나는 예 몇 가지를 끌어옴으로써, 그렇게 해서 우리가 찾는 숨은 원인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실마리를 우연히라도 찾아내기를 바랄 수 있을까?
해 보자. 그러나 이런 문제에서는 섬세함이 섬세함에 호소하며, 상상력 없이는 누구도 남을 따라 이 회랑들로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틀림없이 이제 내보일 상상의 인상들 가운데 적어도 몇 가지는 대부분의 사람이 함께 느꼈겠지만, 그때 그것을 온전히 의식한 사람은 아마 거의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지금 그것을 떠올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배우지 않은 이상을 지닌 사람, 그날의 독특한 성격을 어설프게만 아는 사람에게 성령 강림절, 이른바 흰 주일이라는 말만 나와도 어째서 머릿속에 고개를 떨구고 갓 내린 눈으로 두건을 쓴 채 천천히 걸어가는 순례자들의 그토록 길고, 음울하고, 말 없는 행렬이 줄지어 떠오르는가? 아니면 중부 아메리카 여러 주의 책 안 읽고 순박한 개신교도에게 흰 수사나 흰 수녀라는 말이 지나가듯 나오기만 해도 어째서 영혼 속에 그토록 눈 없는 조각상이 불려 나오는가?
아니면 지하 감옥에 갇혔던 무사들과 왕들의 전승 말고(그것으로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무엇이 있기에, 여행해 본 적 없는 미국 사람의 상상에 런던의 흰 탑이 그 이웃인 다른 이름난 건물들, 바이워드 탑이나 피의 탑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다가오는가? 그리고 그보다 더 숭고한 탑들인 뉴햄프셔의 흰 산맥은 어떤가. 독특한 기분일 때 그 이름만 나와도 거기서 거대한 유령 같은 기운이 영혼 위로 덮쳐 오지만, 버지니아의 푸른 산등성이를 생각하면 부드럽고 이슬 머금은 아득한 꿈결 같은 느낌으로 가득하다. 아니면 어째서 모든 위도와 경도와 상관없이 백해라는 이름은 상상에 그토록 유령 같은 기운을 끼치는데, 황해라는 이름은 물결 위의 길고 옻칠한 듯한 온화한 오후와 그 뒤를 잇는 가장 화려하면서도 가장 졸음 겨운 해넘이라는 이승의 생각으로 우리를 달래 주는가? 아니면 순전히 상상에만 호소하는 전혀 실체 없는 예를 고르자면, 중부 유럽의 옛 동화를 읽을 때 하르츠 숲의 「키 크고 창백한 사람」, 변함없는 창백함으로 숲의 초록 사이를 소리 없이 미끄러져 다니는 그 사람이, 어째서 이 유령이 블록스베르크의 고함치는 꼬마 도깨비들보다 더 무서운가?
대성당을 무너뜨린 지진의 기억만도 아니고, 미쳐 날뛰는 바다의 폭주만도 아니고, 결코 비를 내리지 않는 메마른 하늘의 눈물 없음만도 아니고, (닻을 내린 함대의 기울어진 활대처럼) 기울어진 첨탑과 비틀려 떨어져 나간 갓돌과 온통 축 늘어진 십자가로 이루어진 넓은 들판의 광경만도 아니며, 던져 흩어진 카드 한 벌처럼 집 벽들이 서로 포개어 쓰러진 교외의 거리만도 아니다. 눈물 없는 리마를 그대가 볼 수 있는 가장 이상하고 가장 슬픈 도시로 만드는 것은 이런 것들만이 아니다. 리마는 흰 너울을 쓰고 수녀가 되었고, 그 비애의 이 흰빛에는 더 높은 공포가 있기 때문이다. 피사로만큼 오래된 이 흰빛은 그 폐허를 영원히 새것으로 지킨다. 완전히 썩어 버린 데서 나는 명랑한 초록빛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너진 성벽 위에 제 일그러진 모습을 그대로 굳혀 버리는 졸중의 뻣뻣한 창백함을 펼쳐 놓는다.
흔히 이해하기로는, 이 흰빛이라는 현상이 다른 면에서 무서운 대상의 공포를 부풀리는 으뜸 요인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또 상상력 없는 마음에는, 다른 마음에게는 그 두려움이 거의 오로지 이 하나의 현상에 있는 그런 모습들, 특히 말 없음이나 보편성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꼴로 드러나는 모습들에 아무 공포도 없다는 것도 안다. 이 두 진술로 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마 다음의 예들이 하나씩 밝혀 줄 것이다.
첫째. 뱃사람은 낯선 나라의 해안에 다가갈 때 밤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 퍼뜩 경계하고,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벼릴 만큼만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꼭 같은 상황에서 그를 해먹에서 불러내 그의 배가 한밤에 우윳빛 흰 바다를 헤쳐 가는 광경을 보게 해 보라. 마치 둘러싼 곶들에서 빗질한 흰곰 떼가 그의 둘레를 헤엄치고 있는 듯한 광경을. 그러면 그는 말 없는 미신의 두려움을 느낀다. 흰빛으로 변한 물이라는 수의를 두른 유령이 그에게는 진짜 유령처럼 끔찍하다. 측연이 아직 바닥이 닿지 않는 깊은 물이라고 아무리 장담해도 소용없다. 심장도 키도 둘 다 가라앉는다. 그는 다시 푸른 물이 제 밑에 올 때까지 결코 쉬지 못한다. 그러나 「나리, 저를 그토록 뒤흔든 것은 숨은 암초에 부딪힐까 하는 두려움이라기보다 그 흉측한 흰빛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하고 그대에게 말할 뱃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둘째. 페루의 토박이 인디언에게는 눈으로 가마를 얹은 안데스산맥을 늘 바라보아도 아무 두려움이 일지 않는다. 다만 그토록 엄청난 높이에서 다스리는 영원한 서리의 황량함을 그저 떠올려 보거나, 그런 비인간적인 고독 속에서 길을 잃으면 얼마나 무서울까 하고 자연스레 상상할 때라면 모를까. 서부의 개척민도 거의 마찬가지여서, 그는 바람에 날린 눈으로 덮여 나무나 잔가지의 그림자 하나 흰빛의 굳은 무아지경을 깨뜨리지 않는 끝없는 대초원을 비교적 무덤덤하게 바라본다. 남극 바다의 풍경을 바라보는 뱃사람은 그렇지 않다. 거기서는 때때로 서리와 대기의 힘이 부리는 어떤 지옥의 요술로, 떨면서 반쯤 난파한 그는 제 비참함에 희망과 위안을 말해 주는 무지개 대신, 앙상한 얼음 비석과 쪼개진 십자가들로 그를 보고 히죽거리는 끝없는 교회 묘지 같은 것을 본다.
그러나 그대는 말한다. 흰빛에 관한 그 연백(鉛白) 칠한 장은 겁쟁이 영혼이 내건 백기일 뿐인 것 같다고. 이슈메일, 너는 우울증에 항복하는구나, 하고.
말해 보라. 온갖 맹수에게서 멀리 떨어진 버몬트의 어느 평화로운 골짜기에서 태어난 이 튼튼한 어린 수망아지가, 어째서, 가장 화창한 날에 그 뒤에서 갓 벗긴 들소 가죽 깔개를 흔들기만 해도, 그래서 망아지가 그것을 보지도 못하고 그저 그 야생 짐승의 사향내를 맡기만 해도, 어째서 그 망아지는 흠칫 놀라 콧김을 내뿜고, 터질 듯한 눈으로 미친 듯이 겁에 질려 땅을 긁는가? 녹음 짙은 북쪽 고향에서 사나운 짐승에게 받힌 기억이 그에게 있는 것도 아니니, 그가 맡는 그 이상한 사향내가 지난날의 위험을 겪은 일과 이어진 무엇을 떠올리게 할 리도 없다. 이 뉴잉글랜드 망아지가 먼 오리건의 검은 들소에 관해 무엇을 알겠는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대는 말 못 하는 짐승에게서조차 세상의 악마성을 아는 본능을 본다. 오리건에서 수천 마일 떨어져 있어도, 그 사나운 사향내를 맡으면 찢고 들이받는 들소 떼가, 바로 이 순간 그 들소 떼가 짓밟아 먼지로 만들고 있을지 모를 대초원의 버려진 야생 망아지에게 그렇듯 그에게도 눈앞에 있다.
그러니 이렇게, 우윳빛 바다의 먹먹한 굽이침, 꽃줄처럼 늘어진 산의 서리가 내는 황량한 바스락거림, 대초원에 바람에 밀려 줄지어 쌓인 눈의 쓸쓸한 움직임, 이 모든 것이 이슈메일에게는 겁먹은 망아지에게 들소 가죽 깔개를 흔드는 것과 같다!
신비로운 표지가 그런 암시를 내보이는 그 이름 없는 것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둘 다 모르지만, 망아지에게처럼 나에게도 그것들은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다.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여러 모습에서 사랑으로 빚어진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구체들은 두려움으로 빚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 흰빛의 주문을 풀지 못했고, 그것이 어째서 그토록 큰 힘으로 영혼에 호소하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더 이상하고 훨씬 더 불길한 것은, 우리가 보았듯이 흰빛은 영적인 것들의 가장 뜻 깊은 상징이요, 아니, 기독교인의 신을 가리는 바로 그 너울인데도, 어째서 그러면서도 지금처럼 인류에게 가장 소름 끼치는 것들의 공포를 강하게 만드는 작용자여야 하느냐는 것이다.
흰빛이 그 막연함으로 우주의 무정한 허공과 광막함을 그림자처럼 비추어, 은하수의 흰 깊이를 바라볼 때 소멸이라는 생각으로 우리 등 뒤를 찌르기 때문인가? 아니면 흰빛은 본질에서 빛깔이라기보다 빛깔이 눈에 보이게 없는 것이면서 동시에 모든 빛깔이 엉긴 것이기 때문에, 이런 까닭으로 드넓은 눈 풍경에 그토록 말 없는, 뜻으로 가득한 텅 빔, 우리가 움츠러드는 무신론의 빛깔 없는 모든 빛깔이 있는 것인가? 그리고 자연철학자들의 그 다른 이론, 곧 이 땅의 다른 모든 빛깔, 모든 당당하거나 사랑스러운 문장 장식, 해 질 녘 하늘과 숲의 달콤한 물듦, 그렇다, 나비의 금빛 벨벳과 젊은 아가씨들의 나비 같은 뺨, 이 모든 것이 실제로 물질에 깃든 것이 아니라 그저 밖에서 덧칠한 교묘한 속임수일 뿐이라는 이론을 생각해 보면, 그래서 신으로 떠받들리는 자연 전체가 속에 납골당밖에 감추지 않은 매춘부처럼 영락없이 화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리고 더 나아가 자연의 모든 빛깔을 하나하나 만들어 내는 그 신비로운 화장품, 빛이라는 위대한 원리는 그 자체로는 영원히 희거나 빛깔이 없는 채로 남아 있고, 매개 없이 물질에 작용한다면 모든 대상을, 튤립과 장미까지도 제 텅 빈 빛깔로 물들이리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을 곰곰이 따져 보면, 마비된 우주는 문둥병자가 되어 우리 앞에 누워 있다. 그리고 라플란드에서 빛깔 든, 빛깔을 입히는 안경을 눈에 쓰기를 거부하는 고집 센 여행자들처럼, 가엾은 불신자는 제 둘레의 온 경치를 감싼 기념비 같은 흰 수의를 바라보다가 눈이 멀어 버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상징이 그 알비노 고래였다. 그러니 그대들은 그 불같은 사냥이 놀라운가?
주
1. 북극곰과 관련해, 이 문제에 더 깊이 들어가려는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 짐승의 견딜 수 없는 흉측함을 높이는 것은 따로 떼어 본 흰빛이 아니라고. 분석해 보면 그 높아진 흉측함은, 그 짐승의 책임질 줄 모르는 사나움이 천상의 순결과 사랑의 털옷을 입고 있다는 사정에서 생길 뿐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 그토록 정반대인 두 감정을 우리 마음속에 한데 불러 모음으로써 북극곰은 그토록 부자연스러운 대조로 우리를 겁먹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참이라고 쳐도, 흰빛이 아니라면 그대는 그 강해진 공포를 느끼지 않으리라.
2. 나는 내가 처음으로 본 앨버트로스를 기억한다. 남극 바다에 바싹 붙은 물에서 오래 이어진 강풍이 불던 때였다. 오전 비번 당직을 마치고 아래에서 구름 낀 갑판으로 올라갔더니, 거기 큰 승강구 뚜껑 위에 내동댕이쳐진 채, 티 하나 없이 흰, 갈고리처럼 굽은 숭고한 로마 사람의 부리를 가진 깃털 달린 제왕다운 것이 보였다. 그것은 이따금 대천사 같은 거대한 날개를 둥글게 펼쳤다. 무언가 거룩한 궤를 끌어안으려는 듯이. 놀라운 퍼덕임과 고동이 그것을 뒤흔들었다. 몸은 다치지 않았는데도 그것은 초자연적인 괴로움에 빠진 어느 왕의 유령처럼 울음을 토했다. 말로 할 수 없는 그 이상한 눈을 통해, 나는 하나님을 사로잡은 비밀들을 엿본 것 같았다. 천사들 앞의 아브라함처럼 나는 몸을 굽혔다. 그 흰 것은 그토록 희고, 그 날개는 그토록 넓었으며, 영원히 쫓겨난 그 물에서 나는 전통과 도시들의 비참하게 뒤틀린 기억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그 깃털의 경이를 바라보았다. 그때 나를 꿰뚫고 지나간 것들을 나는 말할 수 없고, 넌지시 비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정신을 차렸고, 몸을 돌려 어느 선원에게 이게 무슨 새냐고 물었다. 구니야, 하고 그는 대답했다. 구니라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이 영광스러운 것이 뭍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결코! 그러나 얼마 뒤에 나는 구니가 앨버트로스를 이르는 어떤 뱃사람들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내가 우리 갑판에서 그 새를 보았을 때 내 것이던 그 신비로운 인상에 콜리지의 거친 「노수부의 노래」가 무슨 관계가 있었을 리는 결코 없다. 그때 나는 그 「노래」를 읽지도 않았고, 그 새가 앨버트로스라는 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함으로써 나는 다만 간접으로 그 시와 시인의 고귀한 공적을 조금 더 빛나게 닦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