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네더필드 응접실에 들어서서 그곳에 모인 붉은 군복 무리 가운데 위컴 씨를 찾다가 끝내 찾지 못하기 전까지, 엘리자베스는 그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그를 틀림없이 만나리라는 확신은, 따지고 보면 마음을 졸이게 할 만도 했던 그 어떤 기억으로도 흔들리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여느 때보다 공들여 옷을 차려입었고, 그의 마음에서 아직 정복하지 못한 부분을 모조리 정복하리라는 더없이 들뜬 기분으로 채비를 했다. 그쯤이야 하룻저녁이면 넉넉히 얻어 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순간 끔찍한 의심이 일었다. 빙리 일가가 장교들을 초대하면서 다아시 씨의 비위를 맞추려고 일부러 그를 뺐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그의 친구 데니 씨의 입으로 확인되었다. 리디아가 냅다 물어보자 데니 씨는, 위컴이 어제 일이 있어서 런던에 가야 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하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이렇게 덧붙였다.
"여기 계신 어떤 신사분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면, 하필 지금 볼일이 생겨 자리를 비우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리디아는 이 대목을 듣지 못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놓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으니 처음 짐작이 맞았을 때와 다름없이 위컴이 오지 않은 데 대한 책임이 다아시에게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다아시에 대한 온갖 불쾌한 감정이 당장의 실망으로 한층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곧바로 다가와 정중하게 안부를 묻는 다아시에게 엘리자베스는 봐줄 만한 예의조차 갖춰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다아시에게 관심을 보이고, 너그럽게 굴고, 참아 주는 것은 곧 위컴을 해치는 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와는 어떤 이야기도 나누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돌아섰는데, 그 언짢은 기분은 빙리 씨에게 말을 건넬 때도 다 떨쳐 내지 못했다. 빙리 씨가 친구를 무작정 감싸는 것이 엘리자베스의 화를 돋웠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언짢은 기분에 오래 빠져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에 품었던 기대는 모조리 무너졌지만 그 일이 오래 마음을 짓누르지는 못했다. 한 주 동안 보지 못한 샬럿 루커스에게 속상한 일을 모두 털어놓고 나자, 엘리자베스는 곧 스스로 화제를 돌려 사촌의 별난 점들을 이야기하며 샬럿에게 그를 눈여겨보라고 가리켜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첫 두 곡이 시작되자 다시 괴로움이 찾아왔다. 굴욕의 춤이었다. 콜린스 씨는 어색하고 엄숙했으며, 춤에 신경을 쓰는 대신 사과만 하고, 자기도 모르게 자꾸 엉뚱한 쪽으로 움직여서, 불쾌한 상대가 두 곡 동안 안겨 줄 수 있는 온갖 창피와 괴로움을 엘리자베스에게 안겨 주었다. 그에게서 풀려나는 순간은 날아갈 듯했다.
다음에는 장교 하나와 춤을 추면서 위컴 이야기를 나누고, 위컴을 다들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 즐거움을 누렸다. 그 춤이 끝나자 엘리자베스는 샬럿 루커스에게 돌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갑자기 다아시 씨가 말을 걸어왔다. 다아시 씨가 너무 뜻밖에 춤을 청하는 바람에 엘리자베스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승낙해 버렸다. 그가 곧바로 다시 걸어가 버리자, 엘리자베스는 자기가 그렇게 침착하지 못했던 것을 두고 속을 끓였다. 샬럿이 달래 주려 했다.
"막상 춰 보면 아주 호감 가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될지도 몰라."
"그런 일은 하늘이 막아 주셔야지! 그건 세상에서 제일 큰 불행일 거야! 미워하기로 작정한 남자를 호감 가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다니! 그런 몹쓸 일은 빌어 주지 마."
그러나 다시 춤이 시작되어 다아시가 춤을 청하러 다가오자, 샬럿은 바보처럼 굴지 말라고, 위컴에게 마음이 쏠려서 그보다 열 배는 지체 높은 남자의 눈에 밉살스럽게 보이는 일은 없도록 하라고 귓속말로 일러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대답하지 않고 줄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다아시 씨와 마주 서는 것이 허락될 만큼 높은 자리에 오르다니 스스로도 어리둥절했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이웃들의 얼굴에서도 똑같은 놀라움을 읽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 침묵이 두 곡 내내 이어지겠구나 싶었고, 처음에는 자기가 먼저 깨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다 문득 상대에게 억지로 말을 시키는 편이 더 큰 벌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어, 춤에 관해 가벼운 말을 한마디 건넸다. 그는 대답하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몇 분 동안 말이 끊긴 뒤 엘리자베스가 다시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다아시 씨가 무슨 말씀이든 하실 차례입니다. 저는 춤 이야기를 했으니, 다아시 씨는 방 크기라든가 춤추는 사람 수라든가 하는 이야기라도 하셔야지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엘리자베스가 바라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장담했다.
"좋습니다. 지금은 그 대답이면 됩니다. 조금 있다가는 제가 개인 무도회가 공개 무도회보다 훨씬 즐겁다는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지금은 잠자코 있어도 됩니다."
"그렇다면 춤을 추실 때는 규칙에 따라 말씀하십니까?"
"가끔은 그렇습니다. 말을 조금은 해야 하니까요. 30분 동안 내리 입을 다물고 있으면 이상해 보일 테지요. 그렇지만 어떤 분들을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말을 적게 하는 수고만 들도록 대화를 짜 드려야 합니다."
"지금 그 말씀은 스스로의 기분을 헤아리신 겁니까, 아니면 제 기분을 맞춰 주신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둘 다예요." 엘리자베스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저희 두 사람은 생각하는 결이 아주 닮았다고 늘 생각했거든요. 둘 다 사람 사귀기를 싫어하고 말수가 적어서, 온 방 안을 놀라게 하고 속담처럼 떠들썩하게 후세에 전해질 말이 아니면 입을 열려 하지 않지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건 그다지 닮은 자화상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제 성품과 얼마나 닮았는지는 제가 뭐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물론 본인께서는 꼭 닮은 초상이라고 여기시는 줄 압니다."
"제 솜씨를 제가 판정해서는 안 되지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줄 끝까지 춤추며 내려갈 때까지 다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가 엘리자베스와 자매들이 메리턴에 자주 걸어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유혹을 이기지 못해 덧붙였다. "요전 날 그곳에서 저희를 만나셨을 때, 저희는 마침 새로운 분과 인사를 나누던 참이었습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 거만한 기색이 한층 짙게 드리웠지만,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자기의 나약함을 탓하면서도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마침내 다아시가 입을 열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위컴 씨는 복 받은 몸가짐을 지닌 덕에 친구를 사귀는 데는 걱정이 없습니다. 그 친구를 지켜 나가는 데도 똑같이 능한지는 그보다 덜 확실합니다만."
"그분은 운 나쁘게도 다아시 씨의 우정을 잃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힘주어 대답했다. "평생 그 일로 고통받게 될 만큼 모질게 말입니다."
다아시는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바꾸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때 윌리엄 루커스 경이 바로 옆에 나타났다. 줄을 가로질러 방 저편으로 가려던 참이었는데, 다아시 씨를 알아보자 걸음을 멈추고 더없이 깍듯하게 절하며 그의 춤 솜씨와 춤 상대를 칭찬했다.
"참으로 흐뭇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렇게 빼어난 춤은 좀처럼 보기 어렵지요. 최상류 사교계에 속하시는 분이라는 게 한눈에 드러납니다. 그렇지만 한마디 덧붙이자면, 어여쁜 춤 상대도 다아시 씨께 조금도 누가 되지 않는군요. 이런 즐거움을 자주 보게 되기를 바라오, 특히 어떤 바람직한 일이 일어날 때 말이오, 일라이저 양(언니와 빙리 쪽을 흘끗 보며). 그때는 축하 인사가 얼마나 쏟아지겠소! 다아시 씨께 여쭙겠습니다만… 아니,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저 젊은 아가씨와 나누시는 황홀한 대화에서 붙잡아 두면 고마워하실 리가 없지요. 저 아가씨의 반짝이는 눈도 저를 나무라고 있군요."
다아시는 이 말의 뒷부분은 거의 듣지 못했다. 그러나 친구를 두고 한 윌리엄 경의 암시가 그에게는 크게 와닿은 듯했고, 그의 눈길은 몹시 심각한 표정을 띠고 함께 춤추는 빙리와 제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고 춤 상대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윌리엄 경이 끼어드시는 바람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렸습니다."
"이야기 같은 건 하고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방 안에서 저희 둘만큼 서로 할 말이 없는 사람들도 없을 테니 윌리엄 경이 방해하실 것도 없었지요. 벌써 화제를 두세 가지 꺼내 보았지만 헛일이었고, 이다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저는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책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책이요… 아, 안 됩니다! 저희는 같은 책을 읽은 적이 없거나, 읽었더라도 같은 느낌으로 읽지는 않았을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유감입니다. 그렇지만 정말 그렇다면 적어도 화제가 모자랄 일은 없을 겁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견주어 볼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아뇨. 무도회장에서는 책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머릿속이 늘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이런 자리에서는 늘 지금 이 순간이 마음을 차지하는 모양입니다. 그렇습니까?" 그가 미심쩍은 얼굴로 말했다.
"네, 늘 그렇지요." 엘리자베스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대답했다. 생각이 화제에서 멀리 떠나 있었다는 것은 곧이어 엘리자베스가 느닷없이 이렇게 말을 꺼내는 데서 드러났다. "다아시 씨, 언젠가 다아시 씨께서 남을 좀처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한번 품은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고 하시는 걸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 원한이 생기는 일에는 무척 조심하시겠지요?"
"그렇습니다."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편견에 눈이 머는 일도 결코 없도록 하시겠고요?"
"그러기를 바랍니다."
"한번 정한 생각을 절대 바꾸지 않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바르게 판단하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 법이지요."
"이런 질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저 다아시 씨의 성품을 그려 보려는 것뿐입니다." 엘리자베스가 진지한 기색을 떨쳐 내려 애쓰며 말했다. "그걸 알아내 보려는 참입니다."
"그래서 잘되고 있습니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진척이 없습니다. 다아시 씨에 대해 워낙 다른 이야기들을 들어서 몹시 헷갈립니다."
"저에 대한 소문이 크게 엇갈리리라는 건 쉽게 믿을 수 있습니다." 그가 엄숙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베넷 양, 지금 이 순간에는 제 성품을 그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 그림이 어느 쪽에도 명예가 되지 못할까 걱정할 까닭이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초상을 그려 두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어떤 즐거움이든 막아 드릴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가 차갑게 대답했다. 엘리자베스는 더 말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다음 곡을 추며 줄을 내려간 뒤 말없이 헤어졌다. 둘 다 불만스러웠지만 그 정도는 같지 않았다. 다아시의 가슴속에는 엘리자베스를 향한 꽤 강한 감정이 있어서 곧 엘리자베스를 용서하게 되었고, 그의 분노는 모두 다른 사람에게로 향했다.
둘이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빙리 양이 다가와서, 정중한 경멸을 띤 얼굴로 이렇게 말을 걸었다.
"그래, 일라이저 양, 조지 위컴한테 아주 반하셨다면서요? 언니분이 그 사람 얘기를 하면서 저한테 이것저것 수도 없이 묻더군요. 그런데 보아하니 그 젊은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도 자기가 돌아가신 다아시 씨의 영지 관리인이던 위컴 영감의 아들이라는 말은 깜박했나 봐요. 하지만 친구로서 권하는데, 그 사람 말을 다 곧이곧대로 믿지는 마세요. 다아시 씨가 그 사람을 몹쓸게 대했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니까요. 오히려 다아시 씨는 늘 그 사람한테 유난히 친절했는데, 조지 위컴이 다아시 씨를 더없이 파렴치하게 대했어요.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다아시 씨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것, 다아시 씨는 조지 위컴이라는 이름만 나와도 견디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오빠는 장교들을 초대하면서 그 사람만 빼놓기가 곤란하다고 여겼는데 그 사람이 알아서 자리를 피해 줘서 무척 기뻐했다는 건 잘 알아요. 그 사람이 이 고장에 온 것부터가 정말 뻔뻔한 일이에요.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일라이저 양, 마음에 둔 사람의 죄를 이렇게 알게 되셨으니 안됐네요. 하지만 정말이지, 그 사람 출신을 생각하면 그보다 나은 걸 기대할 수는 없었겠죠."
"말씀을 들어 보니 그분의 죄와 그분의 출신이 같은 것인가 보네요." 엘리자베스가 화가 나서 말했다. "그분이 다아시 씨의 영지 관리인 아들이라는 것보다 더 나쁜 죄는 하나도 말씀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리고 그거라면 그분이 직접 저한테 말해 줬어요."
"실례했네요." 빙리 양이 코웃음 치며 돌아섰다. "참견해서 미안해요. 좋은 뜻으로 한 말이었어요."
"건방진 아가씨 같으니!"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말했다. "이렇게 하찮은 공격으로 나를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보이는 건 제멋대로 눈감은 무지와 다아시 씨의 악의뿐이야." 그러고는 빙리에게 같은 일을 알아보겠다고 나섰던 큰언니를 찾았다. 제인은 더없이 흐뭇한 미소와 행복으로 빛나는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맞았는데, 그것만 보아도 오늘 저녁의 일들에 얼마나 만족하는지 넉넉히 알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언니의 마음을 단번에 읽었고, 그 순간 위컴에 대한 염려도, 그의 적들에 대한 분노도, 다른 무엇도, 제인이 행복을 향해 더없이 순탄한 길을 가고 있다는 희망 앞에서 모두 물러났다.
"궁금해." 엘리자베스가 언니 못지않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위컴 씨에 대해서 뭘 알아냈는지. 하지만 너무 즐겁게 지내느라 다른 사람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용서해 줄게."
"아니야," 제인이 대답했다. "잊지 않았어. 하지만 만족스러운 얘기는 해 줄 게 없어. 빙리 씨는 그 사람 내력을 다 아는 게 아니고, 다아시 씨의 마음을 가장 상하게 한 사정은 전혀 몰라. 하지만 친구가 품행이 바르고 정직하고 명예를 아는 사람이라는 건 장담하겠대. 그리고 위컴 씨는 다아시 씨에게서 받은 것보다 훨씬 못한 대접을 받아도 마땅했다고 굳게 믿고 있어. 안타깝지만 빙리 씨 말로도, 빙리 양 말로도 위컴 씨는 결코 훌륭한 젊은이가 아니래. 아주 경솔하게 굴어서 다아시 씨의 호의를 잃을 만했던 것 같아."
"빙리 씨는 위컴 씨를 직접 알지는 못하는구나."
"응. 요전 날 아침 메리턴에서 처음 봤대."
"그럼 그 이야기는 다아시 씨한테서 들은 거네. 잘 알겠어. 그런데 성직록에 대해서는 뭐래?"
"다아시 씨한테 여러 번 들었다는데 사정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난대. 하지만 그건 조건부로만 그 사람한테 남겨진 걸로 알고 있대."
"빙리 씨가 진심이라는 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아." 엘리자베스가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장담만 듣고 내가 수긍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지는 마. 빙리 씨는 친구를 아주 그럴듯하게 감쌌겠지. 하지만 그 이야기의 몇 대목은 모르고, 나머지는 바로 그 친구한테서 들었으니까, 나는 두 신사를 여전히 전처럼 생각하겠어."
그러고는 둘 다 더 기분 좋고 생각이 갈릴 일도 없는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었다. 엘리자베스는 빙리의 호의를 두고 제인이 품은, 행복하지만 조심스러운 희망을 기쁘게 들었고, 언니가 그 호의를 더 굳게 믿을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는 말은 다 해 주었다. 빙리 씨가 직접 다가오자 엘리자베스는 루커스 양에게로 물러났다. 방금 춤춘 상대가 괜찮았느냐는 루커스 양의 물음에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콜린스 씨가 다가와서는, 방금 운 좋게도 아주 중대한 사실을 알아냈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주 묘한 우연으로," 그가 말했다. "제 후원자의 가까운 친척 되시는 분이 지금 이 방에 계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 신사분께서 이 댁 안주인 노릇을 하시는 젊은 숙녀께 사촌 드 버그 양과 그 모친 캐서린 영부인의 이름을 말씀하시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지요. 이런 일이 어쩌면 이렇게 놀랍게 일어나는지요! 이 무도회에서 제가 캐서린 드 버그 영부인의… 어쩌면… 조카분을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늦지 않게 알게 되어 그분께 인사를 드릴 수 있으니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금 가서 인사를 드리려 합니다. 진작 인사드리지 못한 것은 용서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런 인척 관계를 까맣게 몰랐다는 것이 제 변명이 되겠지요."
"설마 다아시 씨께 직접 자기소개를 하시려는 건 아니죠?"
"물론 그럴 겁니다. 진작 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십사 청할 겁니다. 저는 그분이 캐서린 영부인의 조카분이시라고 믿습니다. 여드레 전만 해도 영부인께서 아주 평안하셨다고 그분께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말리느라 무던히 애썼다. 소개도 없이 말을 걸면 다아시 씨는 그것을 이모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무례한 결례로 여길 것이고, 어느 쪽에서든 아는 체할 필요는 전혀 없으며, 설령 필요하다 해도 지위가 더 높은 다아시 씨가 먼저 인사를 청하는 것이 도리라고 거듭 일렀다. 콜린스 씨는 기어이 자기 뜻대로 하겠다는 단호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엘리자베스가 말을 마치자 이렇게 대답했다.
"엘리자베스 양, 엘리자베스 양의 이해력이 미치는 모든 문제에서라면 그 훌륭한 판단력을 세상 누구보다 높이 사지만, 평신도들 사이에 정해진 예법과 성직자를 다스리는 예법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드려도 되겠지요. 제가 보기에 성직이라는 직분은 그 위엄에서 이 왕국의 가장 높은 지위와 맞먹습니다. 물론 그와 더불어 걸맞은 겸손한 몸가짐을 지킨다는 조건에서 말입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제 양심의 명령을 따르도록 허락해 주셔야겠습니다. 제 양심은 제가 의무로 여기는 일을 하라고 이릅니다. 다른 모든 일에서는 언제나 길잡이로 삼을 엘리자베스 양의 충고를 이번에 따르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 이 경우에는 교육으로 보나 평소의 공부로 보나, 엘리자베스 양 같은 젊은 아가씨보다는 제가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에 더 알맞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고는 깊숙이 절을 하고 엘리자베스 곁을 떠나 다아시 씨에게 돌진했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 씨가 그 접근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숨죽이고 지켜보았고, 그렇게 말을 걸어오는 데 다아시 씨가 놀란 기색은 아주 역력했다. 사촌은 엄숙하게 절을 하며 말을 시작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지만 다 들리는 것만 같았고, 그의 입술 움직임에서 "사과" "헌스퍼드" "캐서린 드 버그 영부인" 같은 말을 읽었다. 그가 그런 사람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보니 속이 상했다. 다아시 씨는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 그를 뜯어보다가, 마침내 콜린스 씨가 말할 틈을 주자 거리를 두는 정중함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콜린스 씨는 기죽지 않고 다시 말을 늘어놓았고, 두 번째 말이 길어질수록 다아시 씨의 경멸은 눈에 띄게 커져 가는 것 같았다. 말이 끝나자 다아시 씨는 고개만 가볍게 숙여 보이고 다른 쪽으로 가 버렸다. 그러자 콜린스 씨가 엘리자베스에게 돌아왔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가 말했다. "저를 맞아 주신 태도에 불만을 가질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다아시 씨께서는 제 인사를 무척 반기시는 듯했습니다. 더없이 정중하게 대답해 주셨고, 캐서린 영부인의 안목을 굳게 믿기 때문에 영부인께서 어울리지 않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실 리가 없다고 확신한다는 칭찬까지 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었지요. 전체적으로 보아 그분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엘리자베스는 이제 따로 마음 쓸 일이 없어서 거의 온 신경을 언니와 빙리 씨에게 쏟았다. 그렇게 지켜보면서 기분 좋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자 엘리자베스도 어쩌면 제인 못지않게 행복했다. 엘리자베스는 언니가 바로 이 집에 자리 잡고, 참된 애정으로 맺어진 결혼이 줄 수 있는 온갖 행복을 누리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빙리의 두 누이까지도 좋아해 보려고 애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의 생각도 같은 쪽으로 쏠려 있다는 것이 뻔히 보였으므로, 엘리자베스는 너무 많은 말을 듣게 될까 봐 어머니 곁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밤참 자리에 앉았을 때 어머니와 자기 사이에 겨우 한 사람만 끼어 앉게 된 것을 엘리자베스는 더없이 짓궂은 불운으로 여겼다. 그리고 어머니가 바로 그 한 사람(루커스 부인)에게 거리낌 없이, 터놓고, 오로지 제인이 머잖아 빙리 씨와 결혼하리라는 기대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을 알고 몹시 속이 상했다. 신나는 화제였고, 베넷 부인은 그 혼사의 이점을 하나하나 꼽으면서 지칠 줄을 몰랐다. 그토록 매력적인 젊은이이고, 그토록 부자이고, 겨우 3마일 떨어진 곳에 산다는 것이 첫째로 흐뭇한 점이었다. 그다음으로는 두 누이가 제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생각하면 참 든든했고, 그 사람들도 자기만큼이나 이 혼사를 바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제인이 그렇게 크게 시집을 가면 동생들도 다른 부자들을 만날 길이 열릴 테니 작은딸들에게도 아주 전망이 밝은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나이에 시집 안 간 딸들을 언니에게 맡길 수 있게 되면 내키지 않는 사교 자리에 억지로 나가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런 자리에서는 그것이 예법이니 이런 사정을 즐거운 일로 말해야 했다. 그러나 베넷 부인만큼 평생 어느 때든 집에 들어앉아 있는 것을 위안으로 여길 리 없는 사람도 없었다. 베넷 부인은 루커스 부인도 머잖아 그만큼 운이 좋기를 바란다는 덕담을 잔뜩 늘어놓으며 말을 맺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의기양양하게 믿고 있는 것이 뻔히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어머니의 말이 빨라지는 것을 막아 보려고, 아니면 그 행복을 좀 덜 들리게 속삭이도록 타일러 보려고 애썼지만 헛일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속상하게도, 그 말의 대부분을 맞은편에 앉은 다아시 씨가 듣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는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엘리자베스를 나무랄 뿐이었다.
"다아시 씨가 나한테 뭐라고 내가 그 사람을 겁내야 하니? 그 사람이 듣기 싫어할 말은 한마디도 하면 안 될 만큼 우리가 그 사람한테 특별히 예의를 차려야 할 까닭은 없어."
"어머니, 제발 목소리 좀 낮추세요. 다아시 씨 기분을 상하게 해서 어머니한테 무슨 득이 있겠어요? 그래 봐야 그 친구분한테 잘 보이지도 못하실 거예요."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는 똑같이 잘 들리는 목소리로 자기 생각을 늘어놓았다. 엘리자베스는 부끄럽고 속상해서 얼굴이 붉어지고 또 붉어졌다. 다아시 씨 쪽을 자꾸 흘끗거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볼 때마다 두려워하던 바가 사실임을 확인할 뿐이었다. 다아시 씨가 늘 어머니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의 주의가 한결같이 어머니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확신했다. 그의 얼굴은 분개한 경멸에서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엄숙함으로 서서히 바뀌어 갔다.
마침내 베넷 부인도 더 할 말이 없어졌고, 함께 누릴 가망도 없는 기쁨을 되풀이해 듣느라 한참 하품을 하던 루커스 부인은 차가운 햄과 닭고기로 위안을 삼게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이제야 살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밤참이 끝나자 노래 이야기가 나왔고,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몇 번 청을 받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의 뜻에 응하려고 채비하는 것을 보며 낯이 뜨거웠다. 엘리자베스는 의미심장한 눈짓과 말없는 애원으로 그런 친절의 증거를 막아 보려 했지만 헛일이었다. 메리는 알아듣지 못했다. 이렇게 솜씨를 뽐낼 기회가 메리에게는 즐겁기만 했고, 메리는 노래를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몹시 괴로운 심정으로 메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몇 절을 이어 부르는 동안 조바심을 내며 지켜보았지만, 그 조바심은 노래가 끝났을 때 보답을 받기는커녕 더 고약한 꼴을 맞았다. 식탁에서 나온 감사 인사 가운데 한 곡 더 들려주면 좋겠다는 기색이 섞여 있는 것을 알아채자, 메리는 30초쯤 뜸을 들였다가 다른 노래를 시작했다. 메리의 재주는 그런 자리에서 뽐내기에 결코 알맞지 않았다. 목소리는 가냘팠고 몸짓은 꾸민 티가 났다. 엘리자베스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다. 언니를 보았다. 어떻게 견디나 싶어서였지만, 제인은 아주 침착하게 빙리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빙리의 두 누이를 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그리고 다아시에게 비웃는 눈짓을 보내고 있었지만, 다아시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엄숙했다. 아버지를 보았다. 메리가 밤새 노래하지 않도록 나서 달라고 애원하는 눈길이었다. 아버지는 눈치를 알아채고, 메리가 두 번째 노래를 마치자 큰 소리로 말했다.
"그만하면 아주 훌륭하구나, 얘야. 오래도록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다. 다른 아가씨들에게도 솜씨를 보일 시간을 주렴."
메리는 못 들은 척했지만 적잖이 당황했다.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안쓰럽고 아버지의 말도 안타까워서, 자기가 마음을 졸인 것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구나 싶어 걱정스러웠다.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노래를 청했다.
"제가," 콜린스 씨가 말했다. "운 좋게 노래를 부를 줄 안다면 분명히 기꺼이 한 곡 불러 여러분의 청에 응하겠습니다. 저는 음악을 아주 순수한 오락이자 성직자의 직분과도 전혀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여기니까요. 그렇다고 우리가 음악에 너무 많은 시간을 바쳐도 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마땅히 마음을 써야 할 다른 일들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교구 목사는 할 일이 많습니다. 우선 십일조에 관해 자기에게 이롭고 후원자의 비위에도 거슬리지 않게 합의를 보아야 합니다. 설교문은 손수 써야 하고, 남는 시간은 교구 일을 하고, 될 수 있는 한 안락하게 꾸며야 할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자기 거처를 돌보고 손보는 데 쓰기에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모든 사람에게, 특히 자기에게 성직 임용의 은혜를 베푼 분들에게 세심하고 상냥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도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목사에게서 그 의무를 면해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집안과 연이 닿는 분께 존경을 표할 기회를 놓치는 사람을 좋게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고는 다아시 씨에게 절을 하며 연설을 끝맺었는데, 어찌나 큰 소리로 말했던지 방 안의 절반이 다 들었다. 여러 사람이 눈을 휘둥그레 떴고, 여러 사람이 웃었다. 그러나 베넷 씨만큼 재미있어하는 얼굴은 없었다. 그사이 그의 아내는 콜린스 씨가 참 분별 있게 말했다고 진지하게 칭찬하며, 루커스 부인에게 반쯤 속삭이는 소리로 유난히 영리하고 착한 젊은이라고 했다.
엘리자베스가 보기에, 식구들이 오늘 저녁 될 수 있는 한 망신을 당하자고 미리 짜기라도 했다 한들 이보다 더 신나게, 이보다 더 멋지게 제 역할을 해낼 수는 없었을 것 같았다. 그 꼴 가운데 몇몇은 빙리의 눈에 띄지 않았고, 그가 보았을 어리석은 짓에도 크게 괴로워할 성품이 아니니 빙리와 언니에게는 다행이라고 엘리자베스는 생각했다. 그러나 빙리의 두 누이와 다아시 씨가 식구들을 비웃을 기회를 그렇게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다. 그 신사의 말 없는 경멸과 숙녀들의 무례한 미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참기 어려운지 엘리자베스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남은 저녁은 엘리자베스에게 별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 콜린스 씨가 끈질기게 곁을 떠나지 않고 성가시게 굴었다. 다시 춤을 추자고 엘리자베스를 설득하지는 못했지만, 그 바람에 엘리자베스도 다른 사람과 춤을 출 수 없었다. 다른 사람과 춤을 추라고 사정하고, 이 방 안의 어느 아가씨든 소개해 주겠다고 해 보았지만 헛일이었다. 그는 춤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으며, 자기의 주된 목적은 섬세한 정성으로 엘리자베스의 마음에 드는 것이니 저녁 내내 곁을 지키는 것을 철칙으로 삼겠다고 장담했다. 그런 계획 앞에서는 따져 볼 여지가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가장 크게 숨통을 튼 것은 친구 루커스 양 덕분이었다. 루커스 양은 자주 곁에 와서 콜린스 씨의 말 상대를 기꺼이 떠맡아 주었다.
적어도 다아시 씨가 더는 아는 체하는 불쾌함에서는 벗어났다. 다아시 씨는 아무와도 춤추지 않은 채 아주 가까이 서 있을 때가 많았지만, 말을 걸 만큼 다가오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이 아마 위컴 씨를 두고 넌지시 꺼낸 말 때문이리라 생각하고 기뻐했다.
롱번 일행은 손님 가운데 가장 늦게 떠났다. 베넷 부인의 술책으로 다른 손님이 모두 떠난 뒤에도 15분이나 마차를 기다려야 했는데, 그 덕분에 그 집 식구 몇이 그들이 어서 가 주기를 얼마나 진심으로 바라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허스트 부인과 빙리 양은 피곤하다는 불평 말고는 입도 거의 열지 않았고, 어서 자기들끼리 집을 차지하고 싶어 안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두 사람은 베넷 부인이 말을 붙이려 할 때마다 퇴짜를 놓았고, 그 바람에 일행 전체에 나른한 기운이 드리웠다. 콜린스 씨가 빙리 씨와 그 누이들에게 연회가 우아했다느니 손님들을 대하는 태도가 후하고 정중했다느니 하며 긴 연설을 늘어놓았지만 그 나른함은 거의 가시지 않았다. 다아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넷 씨도 똑같이 잠자코 그 광경을 즐겼다. 빙리 씨와 제인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떨어져 함께 서서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엘리자베스는 허스트 부인이나 빙리 양 못지않게 꿋꿋이 침묵을 지켰다. 리디아조차 너무 지쳐서, 이따금 크게 하품을 하며 "세상에, 너무 피곤해!" 하고 소리치는 것 말고는 말이 없었다.
마침내 작별하려고 일어서자, 베넷 부인은 온 식구를 머잖아 롱번에서 다시 보기를 바란다며 더없이 간곡하게 예의를 차렸다. 특히 빙리 씨에게는, 정해진 초대 같은 격식 없이 언제든 와서 식구끼리 먹는 저녁을 함께해 주면 자기네가 얼마나 행복할지 모른다고 힘주어 말했다. 빙리는 고마움과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내일 잠깐 런던에 다녀와야 하는데 돌아오는 대로 되도록 빨리 찾아가겠다고 선뜻 약속했다.
베넷 부인은 더없이 흡족했다. 혼인 계약이며 새 마차며 혼례복이며 꼭 필요한 준비를 감안하더라도 서너 달 안에는 틀림없이 딸이 네더필드에 자리 잡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즐거운 확신을 품고 그 집을 나섰다. 다른 딸 하나를 콜린스 씨에게 시집보내는 일도 그만큼 확실하다고 여겼고, 그만큼은 아니어도 꽤 기뻤다. 엘리자베스는 자식들 가운데 베넷 부인이 가장 덜 아끼는 아이였다. 그래서 그 남자도 그 혼처도 엘리자베스에게는 차고 넘쳤지만, 둘 다 빙리 씨와 네더필드에 가려 빛을 잃었다.